학창 시절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우리를 고민에 빠뜨리던 종이 한 장이 있었다. 바로 생활기록부의 ‘장래희망’ 칸이다. 그 칸에 무엇을 적었는지 기억하는가? 아마도 많은 이가 교사, 의사, 공무원처럼 우리 눈에 익숙하고 주변에서 ‘좋다’고 인정하는 직업을 써 넣었을 것이다. 실제로 2025년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의 조사에서도 학생들의 희망 직업은 여전히 운동선수나 교사, 크리에이터 등에 집중돼 있다. 우리가 보고 자란 세계가 학교와 가정, 미디어라는 좁은 울타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우리는 ‘진학(進學)’과 ‘진로(進路)’를 혼동하며 살아왔다.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를, 고등학교 때는 대학교를, 대학에 가서는 취업만을 목표로 달려왔다. 하지만 진학이 상급 학교로 가는 ‘짧은 고개’라면 진로는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길’이다. 늘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정작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라는 본질적 질문에는 충분히 답하지 못한 채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우리가 발 딛고 선 시대의 물결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소용돌이치고 있다. 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평생직장이란 말은 힘을 잃었고, 한 사람이 여러 직업과 역할을 경험하는 ‘멀티 커리어’ 시대가 됐다. 여기에 인공지능(AI) 기술의 발전은 진로 고민의 차원을 바꿔 놨다. 명문대 졸업장이 기회의 문을 열어 주던 공식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다.
이미 정보기술(IT) 업계에선 숙련된 AI 도구가 초임자의 코딩 실력을 능가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 발리 같은 곳에서는 소수 인원이 AI를 활용해 스타트업을 운영하며 ‘워케이션(Work와 Vacation의 합성어·사무실이 아닌 여행지 및 휴양지 등에서 원격으로 근무하면서 여가를 함께 즐기는 근무 형태)’을 즐기는 모습이 낯설지 않은 풍경이 됐다. 변화 속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적응하는 힘이 곧 생존력이 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사회의 속도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군대’는 거친 파도 같은 시대에 잠시 숨을 고르며 인생의 항로를 재설정하는 소중한 정박지가 될 수 있다. 진로 설계의 삼박자인 자기인식, 진로 탐색 및 설계 중 가장 첫 단추이자 어려운 단계인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에 이보다 진지한 공간은 없어서다. 자신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위해 기꺼이 몰입할 수 있는지 묻는 일은 전역 이후의 삶을 지탱할 가장 단단한 공부가 된다.
공자는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평생 하루도 일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이는 단순히 즐거운 일만 찾으라는 뜻이 아니라 나를 정확히 알고 세상의 변화에 맞춰 생애주기별 계획을 짜야 한다는 통찰이다. 군 생활이 허락하는 사색의 시간을 마중물 삼아 자신의 인생지도를 다시 그려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 우리가 쌓아 올린 진로 철학은 단순히 개인의 성공에 그치지 않는다. 삶의 방향을 성실하게 준비할 때 훗날 우리의 자녀들은 정답이 정해진 ‘장래희망’ 칸이 아니라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진 ‘인생지도’를 선물받게 될 것이다. 군 생활은 청춘의 공백이 아니라 삶의 씨앗을 심는 시간이다. 이 귀한 ‘멈춤’의 시간을 통해 가슴속에 가장 나다운 꿈의 지도를 그려 나가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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