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전사적지를 찾아서 Ⅲ
아프리카-케냐 ②
1895년 영국이 케냐를 식민지화하면서 백인 정착민들이 비옥한 토지 대부분을 차지했다. 토지를 수탈당한 원주민은 강제노동과 무거운 세금을 부담해야 했다. 1920년대 초 케냐 엘리트층을 중심으로 정치조직이 만들어졌고, 이들은 토지반환을 요구했다. 이 조직을 이끈 인물이 케냐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다. 사진=필자 제공
나이로비 국립문서보존소의 케냐 현대사
2차 세계대전 이후 아프리카에서는 민족주의가 확산했다. 그 영향으로 1952년 케냐에서도 ‘마우마우 봉기’라는 무장투쟁이 벌어졌다. 영국군에 대항하는 게릴라전 형태의 독립전쟁이었다. 전쟁에 지친 영국은 1950년대 후반 정치협상을 시작했다. 식민지 유지 비용 증가와 국제여론 압박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것. 드디어 케냐는 1963년 12월 12일 68년의 기나긴 식민지 생활을 끝내고 독립했다.
하지만 독립 이후 케냐는 권력집중과 일당체제로 사회적 갈등에 휩싸였다. 40여 개 민족으로 구성된 케냐는 백인 소유의 토지를 공정하게 재분배하기도 어려웠다. 1982년에는 헌법개정으로 공식적인 일당제 국가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2002년 정권교체로 민주주의 체제가 본격화됐다. 이 같은 독립투쟁, 정치발전 과정은 나이로비 국립문서보존소에서 역사사료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케냐 폭탄테러와 오사마 빈 라덴의 등장
나이로비 국립문서보존소 앞 공터는 혼잡하기 그지없다. 케냐 국기를 한 손에 치켜든 케냐타 동상 주변은 여행객, 노점상, 일용직 근로자, 오토바이 기사로 북새통이다. 이런 밀집된 인파는 대형 사고에 취약하다. 대표적인 참사가 1998년 8월 7일 일어난 ‘미국 대사관 폭탄테러 사건’이다. 이날 폭발물을 가득 실은 트럭이 미 대사관 정문에 정차했다. 운전기사와 경비원이 옥신각신하던 중 엄청난 양의 폭약이 폭발했다. 순식간에 2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5000여 명이 다쳤다. 희생자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테러 배후는 알카에다의 수장 오사마 빈 라덴. 미국의 중동·아프리카 정책에 대한 보복이었다. 사건 현장에는 희생자 추모공원이 조성돼 있다. 당시 비슷한 시간에 탄자니아 다르에스살람에서도 동시에 폭탄테러가 있었다.
안이한 정보 판단이 불러온 9·11 테러
추모공원 전시관에 공개된 테러 생존자 에스터의 증언이다.
“그날 아침 대사관 근처 사무실에 있었다. 엄청난 굉음이 들렸고 순식간에 유리파편이 온몸에 쏟아졌다. ‘도와달라’고 외치는 비명소리로 아비규환이었다. 나는 책상 밑에 깔렸는데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구조대 도움으로 밖으로 나오니 주변 거리와 건물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 테러는 알카에다의 의도를 세계에 처음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하지만 당시 미 정보당국은 이 테러를 단순한 해외 문제로 인식했다. 본토 테러 가능성에 대한 대응은 충분치 못했다. 빈 라덴은 “생각보다 미국의 강력한 보복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항공기 테러로 3000여 명의 시민 목숨을 빼앗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이어졌다.
아프리카 최대 명문 나이로비대 캠퍼스
국립나이로비대학교는 케냐 최고의 명문학교다. 학교본부를 중심으로 12개의 단과대학이 분산돼 있다. 원래 이 학교는 영국이 1956년 왕립기술대학으로 건립했다. 현재는 4만9000여 명의 재학생이 공부하는 케냐의 대표 국립대로 성장했다.
나이로비대 각 캠퍼스 출입구에는 예외 없이 남·녀 경비원 1쌍이 방문자를 검색한다. 토요일임에도 의대 캠퍼스에서는 학생들이 수업 중이었다. 부족한 실습장비로 보충수업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의대 2학년인 무랑기는 케냐의 의료현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나이로비 의대는 동아프리카의 핵심 의료인력을 배출한다. 케냐 의사는 다소 높은 연봉은 보장되지만 편하게 돈을 벌 수는 없다. 좋은 병원은 대도시인 나이로비와 몸바사에 집중돼 있다. 시골병원은 근무환경이 열악하다. 병원비를 못 내는 환자도 너무 많다. 많은 의사가 미국, 영국이나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어한다. 한국에서 병원취업이 가능하다면 졸업 후 당연히 가고 싶다.”
나이로비 서민의 팍팍한 삶
다음 답사지는 케냐 최대의 무역항 몸바사였다.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이른 새벽에 나이로비 중앙역으로 향했다. 호텔 택시기사 알렉스는 깊은 잠에서 깨어났지만 쾌활하고 친절했다. 중앙역은 나이로비 국제공항 근처에 있다. 그는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알렉스는 “직장인 급여는 너무 빈약하다”며 “나름대로 뒷돈을 챙겨 생활비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놨다. 자신도 기차역에 손님을 내려주고 돌아올 때는 공공연하게 호객행위를 하며 비공식 수입을 올린다고도 했다.
요지경 같은 사회실상이 기차역에도 있었다. 탑승객 배낭 검색에 이어 폭발물 탐지견이 승객 주변을 돌고 킁킁거리며 냄새까지 맡는다. 기차표 예약 영수증을 확인한 보안요원은 안내를 자청한다. 매표창구에서 신용카드로 승차권을 구매하려니 요금 단말기가 고장 났다. 현금 사용은 안 되고 케냐 휴대폰으로만 결재가 가능하단다. 막막했다. 결국 안내인이 휴대폰으로 대신 결재하고 기차표를 출력해 왔다. 당연히 도움을 준 보안요원에게는 웃돈이 건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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