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은 억제되지만 권역 기반 경쟁은 더 치열할 전망

입력 2026. 03. 27   15:51
업데이트 2026. 03. 29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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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주변 4개국 관계의 동향과 전망
미·러 관계: 초강대국 연결성의 해체와 권역질서 형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5일(현지시간) 미 알래스카 앵커리지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회담하기 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해 8월 15일(현지시간) 미 알래스카 앵커리지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회담하기 전 악수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현재의 미국·러시아 관계는 전면적 충돌은 피하면서도 구조적 경쟁이 지속되는 ‘관리된 대립(managed confrontation)’ 형태로 전개되고 있다. 군비통제체제의 붕괴, 제재와 탈제재 전략의 충돌, 권역질서를 둘러싼 영향력 경쟁이 동시에 이뤄지면서 양국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 중이다.

올해 미·러 관계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중심으로 한 전략적 대치가 지속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들어 미국은 전쟁에서의 역할을 일정 부분 조정하고 있으며,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는 우크라이나 군사·재정 지원을 지속하면서 러시아의 군사적 확장을 억제하려 하고 있다. 이에 러시아는 장기전을 감수하면서도 전장에서의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유지 중이다.

러·우 전쟁은 초강대국 연결성 해체 이후의 전쟁 양상을 보여 준다. 핵질서가 붕괴된 뒤 권역 간 충돌이 어떻게 장기화되고 관리되지 않는 형태로 지속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사례다. 이는 전쟁의 확산 가능성보다 전쟁이 ‘멈추지 않는 구조’ 자체가 새 질서의 특징임을 시사한다.

둘째, 군비통제질서의 붕괴와 핵억제 경쟁이 심화하고 있다. 지난 2월 5일 미국과 러시아의 핵무기 감축협정인 ‘뉴 스타트(New START)’ 체제가 종료되면서 두 나라의 핵전력 제한과 검증을 규율해 온 제도적 장치가 사실상 사라졌다. 이는 두 나라가 핵전력 현대화와 전략무기 개발을 보다 자유롭게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는 걸 의미한다. 실제로 미국은 전략 핵전력 현대화 프로그램을 추진 중이며, 러시아 역시 신형 전략무기체계와 극초음속 무기 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이 같은 흐름은 미·러 관계가 군비통제 중심의 안정관리 구조에서 억제 경쟁 중심의 전략환경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셋째, 권역질서를 둘러싼 영향력 경쟁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나토를 중심으로 유럽 안보체제를 강화하면서 동맹 네트워크를 재정비 중이다. 러시아는 이에 대응해 비서방 국가들과의 전략적 협력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브릭스(BRICS), 상하이협력기구(SCO),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 확대로 서방 중심 질서에 대한 대안적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움직임은 미·러 경쟁이 단순한 양자 갈등을 넘어 국제정치의 권역 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으로 확장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오늘날 국제질서는 유일 초강대국의 단극질서도, 냉전식 양극질서도 아닌 ‘병렬적 권역질서(parallel regional order)’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초강대국 간 경쟁이 더 이상 하나의 공통 규칙 속에서 조정되지 않고 각 강대국이 자신이 주도하는 권역 안에서 상이한 규칙과 질서를 구축하는 구조를 의미한다.

넷째, 경제·에너지 영역에서의 경쟁과 제재 전쟁이 지속된다. 미국과 서방은 금융 제재, 기술통제, 에너지 제재 등으로 러시아 경제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에 러시아는 중국, 인도, 중동 국가들과의 에너지 협력 확대와 탈달러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에너지와 원자재 공급망을 활용한 러시아의 전략은 제재체제 속에서도 일정한 경제적 회복력을 유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경제적 경쟁은 단순한 제재 정책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과 금융질서를 둘러싼 구조적 경쟁 성격을 띠고 있다.

향후 미국과 러시아는 어떤 관계를 형성할까? 러·우 전쟁 이후 미·러 관계는 냉전형 양극 경쟁이나 탈냉전기의 관리된 경쟁 구조로 설명하기 어려운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현재의 경쟁은 과거와 달리 이념 중심의 체제 경쟁보다 지정학적 영향력과 권역질서를 둘러싼 전략 경쟁의 성격이 강하다. 즉 미·러 경쟁의 핵심은 세계 전체를 대상으로 한 체제 우위 경쟁이 아니라 각자가 속한 지역과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권역 기반 경쟁(regionalized competition)’으로 변화하고 있다.

올해도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개선되기보다 장기적 경쟁과 관리된 긴장상태가 지속되는 구조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러·우 전쟁이 국제정치의 구조적 단층선을 형성한 뒤 두 나라의 전략적 신뢰는 사실상 붕괴된 상태다. 군비통제체제 역시 약화하면서 미·러 관계는 냉전 이후 가장 불안정한 전략환경에 놓여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은 직접적 군사충돌을 회피하려는 최소한의 억제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각자의 전략적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

우선 단기적으론 관리된 대립 구조가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러시아 모두 핵보유 초강대국이란 점에서 직접적 군사충돌이 초래할 위험을 잘 인식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두 나라는 일정 수준의 위기관리 채널을 유지할 필요성을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외교적 갈등과 군사적 긴장이 지속되더라도 냉전시기와 유사한 형태의 전략적 억제 균형이 일정 부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중기적으로는 권역질서를 중심으로 한 전략 경쟁이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나토와 동맹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유럽·대서양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이어 가려 할 것이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공간을 중심으로 중국, 인도, 이란,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과의 협력을 확대하면서 새로운 전략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미·러 경쟁은 단순한 양자 갈등을 넘어 각자 권역에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전략 경쟁의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군비통제체제의 장기적 불확실성도 미·러 관계의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뉴 스타트’ 종료 이후 두 나라 사이의 핵전력 제한과 검증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협정이 단기간에 체결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이로 인해 미국과 러시아는 전략 핵전력과 첨단 무기체계 현대화를 지속할 것으로 보이며 극초음속 무기, 미사일방어체계, 우주·사이버 영역 등 새로운 전략 영역에서 경쟁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군사적 경쟁은 미·러 관계의 긴장을 장기적으로 고착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국제정치환경의 변화가 미·러 관계에 새로운 변수를 제공할 가능성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글로벌 안보환경의 변화, 강대국 간 권력 균형의 재편 또는 특정 지역에서의 전략적 이해관계 조정이 이뤄질 경우 제한적 협력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다. 특히 핵확산 문제, 국제 테러리즘, 북극 지역 개발, 전략적 안정성 관리 등 일부 분야에선 경쟁 구조 속에서도 제한적 협력이 나타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순 없다.

연담린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
연담린 한국국방연구원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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