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시뮬레이션 ‘버블제트’ 가능성 세계 최초 입증
천안함 음모론 불식 산화한 용사 명예 지켜
‘피격에도 침몰 않고 탈출 시간 벌어주는 배’
자율 손상통제 시스템 연구개발에도 박차
매년 3월 넷째 주 금요일, 서해수호의 날이면 국민의 시선은 으레 묵묵히 우리 영해를 사수하는 서해의 장병들에게 향한다. 하지만 차가운 해상 전장 이면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장병들의 튼튼한 방패가 돼온 과학자들도 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는 한국기계연구원과 그 안에서 10년째 민·군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국방기술연구개발센터 이야기다. 글=조수연/사진=이윤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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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식 국방기술연구개발센터장
장병들 생명 책임지는 든든한 과학의 방패…
잠수함 장교 출신으로 해군 잠수함사령관과 군수사령관 등을 역임한 정일식(예비역 소장) 국방기술연구개발센터장은 뼛속까지 바다 사나이다.
그는 육·해·공군 예비역 장성이 포진한 센터를 이끌며 야전 현장의 갈증을 기계연의 원천 기술과 연결하는 최전선에 서 있다. 천안함의 아픔을 현역 시절 뼈저리게 겪었기에 과학이 국방에 가지는 무게감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는 정 센터장은 천안함 피격 당시 기계연의 과학적 입증이 갖는 의미를 짚었다. 그는 과학이 사회의 혼란을 바로잡는 이정표가 됐다고 강조했다.
정 센터장은 “당시 천안함 침몰에 대한 상반된 견해로 논란이 장기화되던 상황에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진실을 국내외에 선언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며 “단지 새로운 기술을 국방에 적용해 군에 도움을 준다는 수준을 넘어 첨예하게 대립된 국론 갈등을 해소하는 해법을 내놓는 역할을 했다는 점이 국가 리더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설립 10주년을 맞은 센터의 존재 이유를 ‘가교’라는 단어로 설명했다. 과학자들은 연구실 사정에 정통하지만 전장의 절박함이나 특수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정 센터장은 “우리 센터는 군수사령부, 전력분석시험평가단, 사관학교 등 주요 기관과 끊임없이 소통하며 현장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역할을 한다”며 “연구원들이 일궈낸 성과를 전장으로 잇는 서포트가 우리의 임무”라고 설명했다.
특히 센터가 나아갈 길로 ‘디지털 대전환(DX)’을 꼽았다. 정 센터장은 “기계라는 단어가 주는 다소 딱딱한 이미지에 디지털을 입히는 것이 우리 센터가 추진하는 DX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정 센터장의 시선은 인터뷰 내내 거친 해상 현장의 실무적 고민에 닿아 있었다. 현장의 절박함을 첨단 기술로 풀어내려는 예비역의 치열한 고심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장병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든든한 과학의 방패. 그것이 기계연 국방기술연구개발센터가 지난 10년의 묵묵한 동행으로 증명해 낸 가장 가치 있는 성과일 것이다.
해군과 대덕 과학자들의 끈끈한 동행
과학으로 찾아낸 천안함의 진실
천안함이 백령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2010년 3월 26일 밤, 대한민국은 깊은 슬픔과 혼란에 빠졌다. 온갖 억측이 유가족과 생존 장병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던 때, 사태를 엄밀한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올린 주역은 대덕연구단지 과학자들이었다.
이들과 해군의 끈끈한 동행은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국기계연구원(기계연)은 국가적 비극이었던 천안함 피격사건의 진실을 과학적으로 규명해내며 해군과 운명적인 인연을 맺었다. 걷잡을 수 없던 국론 분열을 막아낸 기계연의 과학적 분석은 국방과 해군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변곡점이었다.
정정훈 전 책임연구원을 필두로 한 연구진은 수많은 시뮬레이션 끝에 ‘비접촉 수중폭발(버블제트)’에 의해 거대한 군함이 두 동강 날 수 있음을 세계 최초로 입증했다. TNT 360㎏이 수심 7m에서 폭발할 때의 충격파를 전산 영상으로 완벽히 구현한 것. 정 전 연구원은 세계 최초로 수중 충격을 수치화하는 시뮬레이션 기술을 개발한 관련 분야 권위자다. 그는 천안함 피격 사건의 침몰 원인을 조사하는 국방부 합동조사단 자문위원으로도 활약했다.
일반 국민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던 수중 폭발의 위력을 증명해 낸 결정적 성과는 음모론을 불식시키고 차가운 바다에서 산화한 46용사와 해군의 명예를 지켜냈다. 이 공로로 정 전 연구원은 2012년 과학자 최초로 해군 명예준장 계급을 받았다.
천안함의 아픔 이후 해군 함정의 내충격 설계와 생존성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밤을 새워 진실을 밝혔던 노(老) 과학자는 이제 연구 현장을 떠났지만, 그 숭고한 정신은 후배 연구원들에게 이어지고 있다.
스스로 치유하는 함정 개발 박차…46용사에 바치는 50년 기술 진화
천안함 진실 규명을 계기로 구축된 해군과 기계연의 깊은 신뢰관계는 2014년 국방기술 전담 조직인 ‘국방기술연구개발센터’ 설립으로 결실을 맺었다.
단발성 협력에 그치지 않고 우리 함정의 손상통제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과학자들의 집념에서 시작된 인연. 기계연은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아 장병의 생명을 지키는 첨단 국방기술의 산실로 거듭났다. 해군을 넘어 육·공군까지 영역을 넓힌 국방기술연구개발센터도 올해 설립 10주년을 맞는다. 이곳의 예비역 장성들은 연구실의 데이터가 전장에 의미 있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수행 중이다.
기계연이 사활을 거는 분야는 함정의 ‘자율 손상통제 시스템’이다. 천안함의 참상을 확인한 기계연은 ‘피격되더라도 침몰하지 않고 승조원이 탈출할 시간을 벌어주는 배’를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연구원들은 근접 폭발에도 선체가 견딜 수 있도록 내구성을 극대화하는 ‘박스거더(Box Girder)’ 설계를 제안했고, 이는 현재 일부 신조 함정에 적용돼 생명줄 역할을 하고 있다.
대표 연구성과인 ‘스마트 밸브’는 배관 파손 시 인공지능(AI)이 손상 부위를 탐지해 유체를 차단하거나 우회시킨다. ‘AI 기반 자율형 초동진압 소화체계’는 전우를 구하느라 촌각을 다투는 승조원을 대신하는 인공지능 소방관이다. 파도에 요동치는 함정 내부에서도 AI가 화원과 확산 경로를 추적해 정확히 소화수를 내뿜는다.
기계연이 개발한 ‘함정 전투손상통제관리 소프트웨어(SW)’ 역시 최신 함정에 탑재돼 피격 시 최적의 대응 절차를 제시하게 된다.
이 기술들이 실전에서 제 몫을 다하도록 실험 현장에서는 한계 테스트가 이뤄진다. 국내 최대 규모 진동대와 수중 폭발 충격시험기 위에서 25척 이상의 함정 장비들이 엄격한 검증을 거쳤다. 최근에는 가상 공간에 함정을 구현해 부품 마모를 예측하는 디지털 트윈 기술, 선체에 부착해 무인 정비하는 ‘조선용 모바일 측정 로봇(K-MAROBOT)’ 개발 등 유지·보수·정비(MRO) 분야로도 속도를 내고 있다. 기계연은 개발·검증 단계에 있는 핵심 원천 기술들을 신속히 전력화해 야전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연구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류석현 한국기계연구원장은 “전선은 장병이 지키지만, 장병을 지키는 것은 기술”이라며 “첨단 기계에 디지털을 입히는 이 모든 과정의 궁극적 목적은 장병들의 무사 귀환”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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