켜켜이 쌓아올린 찰나의 빛… 그 광적인 시선

입력 2026. 03. 26   16:15
업데이트 2026. 03. 2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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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곁에, 예술
미술관의 문법 ③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빛과 시간이 층층이 쌓인 사진의 집 

지난해 문 연 국내 첫 사진 특화 공립 미술관
세계적 건축가와 국내 건축사무소 공동 설계
카메라인 듯 인화지 뭉치 같은 미술관 외형
사진의 최소 단위인 ‘픽셀’ 건축 언어로 표현
140년 사진 역사 정립, 실험적 전시 동시 진행
예술이자 기록인 사진, 연구와 담론의 장 마련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전경(사진:정지현).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전경(사진:정지현). 사진=서울시립미술관


서울 동북권의 관문, 창동역 4번 출구를 나서면 낯선 건축물이 눈에 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색을 달리하며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이 건물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다. 도봉산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이 오가는 일상적인 역세권에 사진이라는 매체를 위한 최초의 공립미술관이 자리를 잡았다.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하루에도 수십 장의 사진을 찍는 시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동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사진의 본질을 질문하는 곳이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2025년 5월 29일 문을 연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사진 매체 특화 공립미술관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으로, 도봉구 창동에 지하 2층~지상 4층 규모로 건립됐다. 미술관 개관은 2025년이지만 건립을 위한 준비가 시작된 것은 이보다 훨씬 앞선 2015년부터다. 약 10년에 걸쳐 미술관은 그 물리적 형체를 갖추기 전부터 2만여 점의 소장품을 수집하고 연구를 축적해 왔다. 암실에서 사진이 인화되길 기다리듯, 공간보다 먼저 미술관이 품게 될 내용을 견고히 쌓아온 것이다.

미술관이 위치한 지역적 맥락 또한 상징적이다. 그동안 서울의 주요 문화 인프라는 도심과 강남권에 집중돼 있었다. 서울시는 시민들이 본인의 생활권 내에서 문화를 향유할 수 있도록 문화시설 확충에 힘써왔는데, 그 전략적 요충지 중 한 군데가 창동이다. 이곳은 인근의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과 물리적·기능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도보 거리에 있는 두 미술관은 동북권 문화 벨트의 핵심축으로 역할을 한다.

북서울미술관이 현대미술 전반을 아우르는 커뮤니티형 미술관이라면 사진미술관은 매체의 전문성을 극대화한 아카이브형 미술관으로서 상호보완적 역할을 한다. ‘박물관·미술관 도시 서울’이라는 장기 비전 속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그 첫 번째 장르 특화 공립미술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2026년 3월 미디어 특화 미술관인 서서울미술관이 금천에 개관하며 서울의 문화 지도는 더욱 촘촘해지고 있다. 이제 시민들은 멀리 이동하지 않고도 동네 어귀에서 세계적 수준의 사진 예술과 동시대 담론을 만날 수 있게 됐다.

건축의 문법: 픽셀로 세운 건축, 빛을 설계하다
미술관 외관은 그 자체로 거대한 카메라 혹은 인화지 뭉치를 떠올리게 한다. 건축은 오스트리아 건축가 믈라덴 야드리치와 국내 건축사무소 일구구공도시건축이 공동 설계했다. 두 건축가가 선택한 출발점은 사진의 최소 단위인 ‘픽셀’이다. 건물 외벽을 구성하는 불규칙한 직사각형 모듈들은 픽셀을 건축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또한 사진의 기본 원리인 카메라 조리개의 메커니즘을 시각화해 반사와 투과가 동시에 가능한 소재로 마감된 외벽은 빛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색과 표정이 달라지게 설계됐다. 즉, 건물 자체가 빛으로 찍히고, 다시 빛을 담아내는 거대한 인화지인 셈이다. 

내부 공간의 구성도 사진의 속성을 반영한다. 사진이라는 장르를 위해 설계된 공간이라는 점에서 이곳은 하나의 실험실에 가깝다. 약 7000㎡ 규모의 건물에는 전시실뿐만 아니라 암실, 포토라이브러리, 교육 공간이 갖춰져 있다. 빛에 민감한 사진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전시실은 정교한 조도 조절이 가능한 화이트 큐브로 설계됐고, 건물 하단부에는 국내 최초의 ‘저온 필름 수장고’를 갖춰 한국 사진사의 맥을 계승하는 블랙박스를 구축했다. 즉, 사진을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생산과 연구, 유통 과정을 포함하는 역동적인 매체로 전제한 구조다.

140년 사진의 역사
미술관 개관과 함께 열린 특별전 주제는 ‘광(光)적인, 시선’으로 두 편의 전시가 동시에 개최됐다. ‘광채 光彩: 시작의 순간들’은 한국 사진 140년의 역사를 조망하는 아카이브적 기획으로, 조선인 최초로 사진 개인전을 연 정해창부터 1세대 여성 사진작가 박영숙에 이르는 흐름을 재조명했다. 사진이 예술로 정립돼 온 과정,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지워지거나 잊힌 이름들을 다시 불러내는 작업이었다. 또 다른 개관전 ‘스토리지 스토리’는 미술관 건립의 과정 자체를 사진 매체로 풀어낸 실험적 전시로, 제도와 공간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사진 언어로 기록했다. 이 두 전시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지향하는 두 개의 축, ‘사진 역사의 정립’과 ‘동시대의 실험’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개관 이후의 행보 역시 이 두 축을 충실히 이어가고 있다. ‘사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사진의 범주를 한층 확장한 전시로, 회화, 조각, 설치, 영상과 결합된 작품들은 사진이 하나의 독립된 매체를 넘어 동시대 미술을 확장하고 실험한 핵심 언어로 작동해왔음을 조명했다. 이 흐름은 2026년 4월 개최될 서울사진축제 ‘컴백홈’으로 이어진다. 5년 만에 재개되는 이 축제의 주제는 ‘컴백홈(Come Back Home)’으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집(House)을 넘어 기억과 시간, 관계와 정체성이 켜켜이 쌓인 삶의 자리로서 집(Home)을 사진으로 탐구한다. 전시 공간은 각기 다른 방의 구조로 구성되어 관람객이 하나의 집을 거니는 듯한 경험을 선사할 예정이다. 그동안 서울 곳곳에서 개최되며 흩어져 있던 도시의 사진 담론이 사진미술관이라는 공간으로 모이며, 미술관은 비로소 ‘사진의 집’이라는 이름을 획득하게 됐다.

사진이 집을 얻은 자리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탄생 순간부터 복제성과 기록성이라는 본질적 특성으로 인해 여러 논쟁과 함께해 왔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이면서 동시에 고도의 미학적 판단을 요구하기에 순수미술과 상업 사진의 경계,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에 대한 논쟁이 끊임없이 교차해 왔다. 스마트폰 하나면 누구나 당장 찍을 수 있다는 민주성이 사진의 힘이자, 사진이 미술 제도 안에서 끝없이 논쟁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은 예술인가, 기록인가. 작가의 의도가 먼저인가, 드러난 현실이 먼저인가. AI가 생성한 이미지도 사진으로 볼 수 있는가. 디지털 전환 이후 사진을 둘러싼 질문들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전시 공간을 넘어 연구와 담론의 기관을 자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을 둘러싼 오래된 긴장과 새로운 질문들을 공론화할 수 있는 장이 비로소 마련된 것이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140년 한국 사진사의 궤적을 보존하는 보관소인 동시에, 시민들이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나누는 문화예술 플랫폼이다. 이곳은 과거의 필름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중추이자, 작가와 애호가가 활발히 교류하며 미래의 시각 문화를 생산하는 현장으로 역할을 할 것이다. 차가운 카메라 렌즈 너머 따뜻한 인간의 온기를 인화해내는 이 역동적인 아카이브는 가장 민주적인 매체가 가장 일상적인 자리에 뿌리내림으로써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왔다. 셔터는 열렸고, 그 틈으로 새로운 시대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이야기할 것인가.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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