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치유하는 '쉼' 자연에서 배운 재생의 언어

입력 2026. 03. 26   16:51
업데이트 2026. 03. 2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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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인문학-두 도시 이야기
 스위스 취리히와 대만 타이중 <下>

동쪽의 '옥산' 서쪽 '일월담' 곁에서 깨친 느림의 미학
전쟁·재해로 파괴된 도시 부수는 대신 새롭게 해석
골목 곳곳에 전통 수제품 디저트 인기
노인의 음료 고정관념 깬 젊은 감성의 버블 밀크티 이곳서 탄생
실험적 건물 신도심 완성, 고객 맞춤형 기계 산업은 세계적 수준
도시의 편의 자연의 여유 일상에 스며

 

‘대만의 심장’ 타이중은 대만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다. 타이중은 웅장한 옥산과 일월담의 잔잔한 호수로 가기 위한 관문도시다. 타이중 사람들이 보여 주는 삶의 리듬은 바로 ‘자연과의 공생’이다. 스위스 취리히가 엄격한 질서로 자연과의 조화를 이뤘다면 타이중은 창의적 재생으로 자연을 품에 안았다.

 

대만인에게 ‘영혼의 안식처’로 불리는 일월담.
대만인에게 ‘영혼의 안식처’로 불리는 일월담.


느린 도시의 미학

타이중은 종종 ‘노잼 도시’라는 농담 섞인 소리를 듣는다. 우리도 타이중에 별 기대가 없었다. 이미 타이베이, 가오슝, 타이난에서 각각 한 달 살기를 한 뒤였다. 하지만 이 ‘노잼 도시’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한 달을 보내고 나니 타이중이 대만인이 가장 살고 싶어 하는 도시 1위로 꼽히는 이유를 알게 됐다. 타이베이처럼 화려한 랜드마크가 많지 않고 가오슝처럼 강렬한 에너지는 없지만 연중 온화한 기후, 저렴한 주거비, 여유로운 공간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도시 곳곳에 스며든 ‘느림의 미학’이 주는 정서적 안정감이 있었다.

타이중에선 공원에 앉아 느긋하게 오후 햇살을 즐기는 사람이 유독 많다. 이곳 사람들은 ‘빨리 빨리’보다 ‘천천히 제대로’를 선호한다. 이런 문화가 도시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골목 곳곳의 작은 서점, 수제 공예품 가게, 할머니가 직접 만드는 전통 디저트 가게들이 효율성으로 무장한 대형 체인점에 밀리지 않고 여전히 건재하다. 시민들이 ‘느리지만 진심이 담긴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타이중의 건축유산 재사용의 상징적 사례 ‘궁원안과’. 타이중 도시재생의 정수를 보여 주는 랜드마크다.
타이중의 건축유산 재사용의 상징적 사례 ‘궁원안과’. 타이중 도시재생의 정수를 보여 주는 랜드마크다.

 

시간의 흔적 위에 젊은 감각을 덧입힌 지속 가능한 재생과 창의성의 공간 ‘심계신촌’.
시간의 흔적 위에 젊은 감각을 덧입힌 지속 가능한 재생과 창의성의 공간 ‘심계신촌’.

 

건물을 통해 읽는 역사

타이중 사람들은 낡은 것을 부수기보다 그 위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으며 자신들만의 행복을 설계해 나간다. 타이중의 역사는 청나라 시대 상업도시에서 출발해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로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식민 근대화의 흔적, 전쟁과 자연재해의 상처, 시민들이 그것을 창의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이 겹쳐졌다.

타이중 구도심을 거닐다 보면 낡은 건물이 새로운 생명을 얻은 풍경을 목격할 수 있다. 그중 가장 상징적 사례가 ‘궁원안과’다. 이 건물은 1927년 일본인 의사가 안과로 운영했다. 당시 일본인 의사들은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고, 이 건물은 시대의 위계질서를 보여 주는 증거였다.

하지만 대만 현대사의 큰 재해인 9·21 대지진으로 건물이 파괴됐다. 피해를 본 궁원안과는 그대로 방치됐다. 2010년 한 기업가가 파격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낡고 허름한 건물 외관은 그대로 두고 내부만 완전히 새로 꾸민 것. 천장부터 바닥까지 고서적들로 빼곡한 공간, 해리 포터의 마법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미로 같은 레이아웃이 인상적이었다. 그 안에서 케이크와 음료를 즐기며 궁원안과는 과거의 상처를 예술과 창의성으로 치유했다.

인근 ‘제4신용합작소’도 비슷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 신용금고는 아이스크림과 대만차를 판매하는 상점으로 변했다. 은행의 흔적은 한편에 잘 보존된 강철 금고문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오래된 금고의 어두운 내부와 현대 디저트 가게의 밝은 조명이 한 공간에서 만나고 있었다.

과거 정부 회계감사관들이 거주하던 ‘심계신촌’도 타이중의 역사를 새롭게 만들고 있는 장소다. 한때 관료들이 사용했던 공간이 핸드메이드 가죽공방, 독특한 디저트 카페, 독립서점으로 변모했다. 주말마다 열리는 마켓은 수많은 인파를 불러 모으며 연간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역동적인 문화공간이 됐다. 낡은 계단과 빛바랜 벽면을 그대로 살려 둔 채 그 위에 청년들의 감각을 덧입혔다. 청년들의 꿈을 담는 그릇으로 바뀐 심계신촌은 타이중이 추구하는 ‘지속 가능한 도시재생’의 상징이 됐다. 


1950년대 미군 원조 밀가루와 대만 전통 맥아당이 만나 탄생한 '태양병'.
1950년대 미군 원조 밀가루와 대만 전통 맥아당이 만나 탄생한 '태양병'.

 

춘수당 본점에서 맛볼 수 있는 원조 버블 밀크티.
춘수당 본점에서 맛볼 수 있는 원조 버블 밀크티.


버블 밀크티의 원조

타이중에 머무는 동안 음식 하나하나가 대만의 근현대사를 조용히 짚어 주는 듯했다. 타이중을 대표하는 과자 ‘태양병’은 1950년대 미군의 원조물자가 대만에 쏟아지던 시기에 탄생했다. 현지 제과 장인들이 전통 맥아당 과자 제조법을 버터와 쇼트닝으로 변형해 만든 것이다. 대전 성심당이 원조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냈던 이야기와 묘하게 닮았다.

바삭한 페이스트리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고, 맥아당 시럽의 진한 단맛이 뒤따른다. 갓 구운 태양병을 집어 들면 버터 향이 코끝을 스치며 한층 그 맛이 짙어진다. 둥근 모양과 황금빛 껍질이 마치 태양을 닮았다고 ‘태양병’이란 이름이 붙었다.

대만의 또 다른 상징 ‘버블 밀크티(전주나이차)’ 역시 타이중에서 탄생했다. 1980년대 작은 식당 ‘춘수당’의 한 직원이 타피오카 볼을 밀크티에 넣는 파격적인 시도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 실험은 ‘노인들이 마시는 차’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차 문화를 젊은 세대의 감성으로 재해석했다.

오늘날 대만의 버블 밀크티 시장은 전장이라고 할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매년 새로운 브랜드가 생겨나고 유행이 빠르게 바뀌지만 그 속에서도 ‘원조’ 춘수당의 이름은 여전히 견고하다. 이곳의 밀크티는 달콤함을 절제해 차 본연의 깔끔한 향과 청량함을 살린다.

음식을 발명한 타이중 사람들의 창의성은 산업에서도 빛을 발한다. 대만 최대이자 세계적인 정밀기계 산업 클러스터가 이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글로벌 공작기계 시장에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타이중은 고객의 세밀한 요구에 맞춰 기계를 설계·제작하는 ‘커스터마이징’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0.001㎜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정밀제작 과정은 타이중 사람들의 기술력과 창의성을 잘 보여 준다. 이 같은 창의성은 타이중을 오늘날 대만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

신도심으로 들어서면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실험적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심엔 일제강점기 한국에서 태어난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오가 설계한 ‘국립가극원’이 있다. 그는 기둥이 없는 ‘소리의 동굴’ 구조를 적용해 건물을 완성했다. 내부의 유려한 곡선 벽은 인체나 자연 동굴처럼 유기적으로 이어져 공기, 빛, 소리가 자유롭게 흐르도록 설계됐다. 공연이 없는 날에도 시민들은 극장 로비를 산책하며 곡선 벤치에 앉아 책을 읽는다.

 

 

‘소리의 동굴’이라는 혁신적 콘셉트로 설계된 대만 국립가극원 전경.
‘소리의 동굴’이라는 혁신적 콘셉트로 설계된 대만 국립가극원 전경.


자연과 도시가 맞닿은 곳

타이중이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는 높은 자연 접근성이다. 도시 동쪽에는 해발 3952m의 옥산이 우뚝 솟아 있다. 옥산 등반과 정상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대만인의 버킷리스트다. 옥산 인근의 아리산은 세계적인 우롱차 산지다. 고산지대에서 자란 차의 청아한 향으로 유명하다.

서쪽에는 대만 최대의 담수호인 일월담이 자리한다. 달처럼 둥근 서쪽 호수와 해처럼 밝은 동쪽 호수가 맞닿아 있는 이곳은 홍차 산지로도 이름이 높다. 자전거도로를 따라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주말여행은 타이중 사람들의 대표적인 여가생활이다.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동안 삶의 리듬이 다시 살아난다.

타이중은 도시의 편의를 누리면서도 언제든 자연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고속철도가 개통되며 쓰이지 않게 된 1.6㎞ 폐선로를 버리지 않고 멋진 공원으로 재탄생시켰다. 1908년 개설된 타이중·타이난 구간의 옛 철길을 따라 수목원과 벤치, 조명, 예술작품을 배치해 ‘철도 위의 공원’을 만들었다. 곳곳에 남겨진 레일과 침목, 신호시설의 흔적은 세월의 기억을 품고 있다. 시민들에게 ‘타이완 커넥션 1908’이란 이름으로 사랑받고 있다.

또 하나의 명소인 ‘캘리그래피 그린웨이’는 국립자연과학박물관에서 국립대만미술관까지 3.6㎞를 잇는 녹지 산책길이다. 걷는 동안 카페, 디자인숍, 독립서점, 편집숍을 만나며 도심 속에서 자연과 문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다. 그 한가운데 자리한 시민광장은 타이중의 심장 같은 공간이다.

우리가 타이중에서 가장 사랑한 순간은 바로 이곳에서 이뤄졌다. 따스한 햇살 아래 현지인과 어우러진 평화로운 오후였다. 시민광장은 젊은 연인들의 로맨틱한 명소이자 트렌디한 카페와 패션 브랜드가 둘러싼 활기찬 공간이다. 아이들은 공놀이에 몰두하고 연인들은 손을 잡고 산책을 했다. 우리는 한강공원처럼 돗자리를 펴고 잔디에 누워 석양을 바라봤다. 저무는 해가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풍경은 우리의 마음에 잔잔히 스며들었다.


타이중은 과거의 기억을 미래 자산으로 바꾸며 대만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성장했다.
타이중은 과거의 기억을 미래 자산으로 바꾸며 대만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성장했다.


자연 속에 머무는 시간 

취리히 사람들에게선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맑은 자연을 사랑하는 성숙함이 느껴진다. 반면 타이중은 낡은 것을 새롭게 바꾸는 창의력과 자연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여유를 누린다.

취리히 호숫가 벤치에 앉은 사람들, 타이중 공원에서 돗자리를 깐 가족들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순위나 통계보다 거리에서 걷는 사람들의 표정, 공원에서 웃는 모습, 동네 이야기를 나눌 때 반짝이는 눈빛에서 진짜 멋을 느낄 수 있다. 취리히의 호수 옆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타이중 시민공원에서 자전거를 타며 깨달았다. 살기 좋은 도시는 나무가 많은 게 아니라 사람들이 자연 속에 머무는 시간이 많은 곳이라는 걸.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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