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그리고 회상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3국 협상국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독일은 더 이상 프랑스로 진출할 수 없었다. 특히 1916년 2월부터 12월에 있었던 베르뒹전투와 7월부터 11월에 있었던 솜전투에서 대패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이로 인해 전쟁 양상은 상호 고착된 가운데 엄청난 희생을 강요하는 참호전으로 전환됐다. 독일은 전체 전선에 걸쳐 깊은 교통호와 전투호를 구축하고 참호전을 펼쳤다. 1918년 3월 독일의 루덴도르프 공세(춘계 공세)와 협상국의 백일 공세 등 서로 주고받는 작전을 수행했지만 전세는 이미 협상국 쪽으로 기울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독일은 군수물자 보급의 어려움과 병력 보충의 제한 등으로 전쟁을 지속하기 점점 어려워졌다. 반면 미국의 참전으로 협상군의 전쟁 수행 여건은 크게 좋아지고 있었다.
독일의 ‘11월 혁명’과 제국군의 와해
이제 독일의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특히 1918년 11월 독일에서 발생한 ‘11월 혁명’은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독일 북부 발트해 연안 킬(Kiel) 군항에서 해군 수병들이 전쟁 막바지에 승산이 없어 보이는 영국 해군과의 ‘최후의 전투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수병들의 반란은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퍼져나갔고, 전국으로 확산해 러시아 소비에트를 본뜬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곳곳에 세워졌다.
11월 9일에는 베를린이 점령됐고, 군대가 와해되기 시작했다. 위협을 느낀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해 버렸다. 독일 정부는 붕괴돼 이제 더 이상 전쟁 수행이 불가능해졌다. 결국 독일은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프랑스 파리 북부 콩피에뉴 숲속 열차에서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항복했다. 길고 지루했던 1차 대전이 막을 내린 것이다.
전쟁의 진화와 무고한 희생
1차 대전으로 민간인과 군인을 합쳐 2500여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관총의 엄호를 받으며 참호전을 수행한 소모전의 결과다. 특히 산업혁명 여파로 과학기술과 생산성이 향상된 산업기반체계는 무기 발전을 촉진했다. 대규모의 부대 이동과 보급은 철도를 이용했고 전투기와 전차, 중기관총 등 살상 효과가 훨씬 커진 무기들이 활용됐다. 독일이 사용한 중기관총은 프랑스군이 참호 밖으로 나와 기동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등 참호전에서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철조망 같은 기동을 막는 장애물도 한몫했다.
협상국으로선 철조망과 기관총을 극복하고 보병의 기동을 방호하기 위한 대책이 절실했다. 궁리 끝에 등장한 것이 바로 전차였다. 영국에서 개발한 마크-Ⅰ 전차가 처음 사용된 것은 1916년 9월 솜전투다. 뒤따라 프랑스가 르노 전차를 개발했다. 독일은 2년 뒤에야 ‘A7V’라는 모델을 선보였지만 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독일은 그동안 주로 정찰용 목적으로만 운용하던 항공기에 기관총을 부착해 공중전투를 펼쳤고, 폭탄을 탑재해 지상에 폭탄을 투하했다. 영국을 공습할 때 바로 이 폭격기가 사용됐다.
막을 수 없었던 제국주의의 충돌
또 하나의 신무기는 잠수함이었다. 1915년 2월부터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를 뚫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유보트(U-boat)를 동원했다. 화학무기도 처음으로 등장했다. 독일은 1915년 4월 벨기에의 이프르(Ypres)전투에서 처음으로 염소 독가스를 사용해 큰 피해를 유발했다. 영국에서는 상선을 개조한 항공모함이 처음 등장했으며, 독일은 420㎜ 대형 곡사포도 선보였다.
혹자는 통일 달성 후 비스마르크가 주장했던 것처럼 빌헬름 2세가 러시아와의 동맹관계를 파기하지 않고 유지했다면 전쟁이 발발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누적된 여러 갈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고 있었고, 마치 무엇이든 건드리면 ‘이때다’ 하고 달려들 기세가 팽배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 열강들이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확장하면서 내재된 불만과 신흥제국들의 빠른 성장은 견제와 충돌로 이어졌다. 특히 발칸반도에서 범게르만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대한 범슬라브족(세르비아)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그 배후에는 독일과 러시아가 있었다. 결국 막을 수 있는 전쟁이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이었다.
1차 대전의 회상, 모리스 라벨
프랑스의 작곡가 모리스 라벨은 1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투에서 부상당해 오른팔을 잃은 피아니스트를 위해 왼손으로만 연주하는 곡을 만들었다. 바로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이다. 오른팔을 잃은 주인공은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1887~1961)이다.
그는 전쟁이 발발하자 기병대 소위로 폴란드의 갈리시아(Galician) 전투에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의 총탄에 팔꿈치를 맞아 오른팔을 절단해야 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의 패배로 러시아군의 포로가 돼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수용소에서 그는 왼손만으로도 피아노를 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나무상자 위에 손가락을 두드리며 연습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 석방된 비트겐슈타인은 스승인 요셉 라보르(1842~1924)의 도움으로 왼손으로만 피아노를 칠 수 있도록 편곡한 곡으로 공연도 했다. 그는 유명해지면서 여기저기 작곡도 의뢰했다. 의뢰를 받은 라벨은 비록 비트겐슈타인이 적군이었지만 기꺼이 수락, 1929~1930년에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을 완성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곡이 너무 어려워 수정을 요구했지만 라벨은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드디어 1931년 11월 빈에서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초연이 이뤄졌다. 연주회는 성황리에 끝났고, 그제야 비트겐슈타인도 곡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왼손을 위한 피아노협주곡’, 전쟁 참상 담아
이 곡을 들으면 ‘이게 정말 한 손으로 치는 연주일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크게 3부로 이뤄졌지만 단악장의 곡으로 20분가량 연주가 이어진다. 시작은 마치 전쟁터로 들어가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이어 관악기들이 합류해 본격적으로 전쟁이 진행되는 듯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리고 피아노가 등장해 전장의 참담함, 우울함, 좌절감 같은 느낌을 준다. 금관악기와 타악기는 전쟁터의 격정적인 흐름을 알리는 듯하다가 다시 피아노의 빠른 템포가 쉼 없이 연주되면서 전체를 이끌고 끝을 맺는다.
라벨은 비트겐슈타인의 왼손 연주를 통해 전쟁의 참상과 절망, 공포는 물론 본인이 전장에서 체험했던 참담함을 전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 어려운 곡을 왼손만으로도 훌륭히 연주함으로써 전쟁이 안긴 고난과 시련, 상처를 극복하는 인간의 강한 의지를 표현하려 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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