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서울 옥인동 ‘벽수산장’
주변 경관 빼어나 권력자들 탐낸 곳
윤덕영, 송석원 일대 2만 평 사들여
유럽식 호화건물 짓고 연못 등 조성
3층 건물선 경복궁 내려다볼 수 있어
병원·유엔군 장교 숙소 등으로 변신
불타 폐허로 방치되다 1973년 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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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촌에는 구보에게 하나의 이미지로 기억되는 아름다운 건물이 있었다. 유럽 궁전 같던 그 건물은 크기와 화려함으로 호기심을 자극했다. 1973년 봄, 지금의 수성동 계곡 입구에서 처음 마주했는데 한참을 멍하니 바라봤다. ‘언커크’로 불리던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 사무실이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좁은 골목과 다세대주택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 마치 신기루를 본 듯 느껴진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건축물이던 ‘벽수(碧樹)산장’이었다.
서촌은 원래 비제도권 문학을 일컫는 ‘위항(委巷) 문학’의 산지였다. 정조 때인 1786년 중인·서얼·서리·평민 등 여항(閭巷)인 출신으로 구성됐던 ‘송석원(松石園) 시사’가 그 중심에 있었다. 옥류동 서당 훈장 천수경(1758~1818)이 ‘송석원’이라고 명명한 자신의 집을 무대로 전설을 썼다. 통의동에 살던 추사 김정희가 시사의 헌액을 써서 증정하고 단원 김홍도가 ‘송석원 시사 야연도’를 그렸을 만큼 명성이 자자했다.
송석원은 천수경 사망 이후 ‘장김(壯金·안동 김씨 벼슬파)’의 김수근과 김병국이 소유했다가 1860년대 ‘장김’이 힘을 잃자 세도정치의 중심에 있던 민태호·민규호·민영익 등 여흥 민씨들이 차례로 차지했지만 1904년 순종의 정후 순명효황후 민씨 사망을 계기로 매각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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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즈음 송석원의 새 주인이 등장한다. 일제 때 남작 작위를 누린 윤덕영(1873~1940)이었다. 그는 46만 원을 들여 이 일대를 매입했다(조선일보 1926년 5월 31일 자). 구보는 안동 김씨에서 여흥 민씨, 파평 윤씨로 시대에 따라 소유주가 바뀐 사실에서 권력을 쥔 부류가 모두 탐냈을 정도로 옥인동 계곡이 절경이었음을 유추한다.
윤덕영은 동생 윤택영(1976~1935)의 딸이 1907년 순종비인 순정효황후 윤씨(1894~1966)가 되자 1908년 시종원경에 올라 권력을 쥐락펴락하며 사간동 97번지에 큰 한옥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옥인동의 약 54%를 소유했다. 수성동 계곡, 배화여고, 인왕산 자락 등이 포함됐다. 윤덕영 탓에 송석원의 오랜 풍경이 바뀌게 된다. 그 자리에 유럽식 호화 건물을 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사진을 보면 기와집과 초가집 속에서 홀로 두드러지게 서 있다.
그 공간에 느닷없이 으리으리한 서양 건물을 지은 동기에 관해선 남아 있는 기록이 없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이 부추긴 과시욕이 아니었을까 구보는 추측한다. 순종이 내린 자신의 호를 따 ‘벽수산장’이라고 이름 지은 이 건물은 프랑스공사를 지낸 민영찬이 소유하고 있던 유럽 귀족 별장 설계도를 그대로 복제했다. 1913년에서 1917년까지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연건평 2628㎡(약 795평) 규모로 지었다. 내부 공사를 끝내기까지 18년이 걸려 1935년에 완성됐다. 공사는 순탄치 않았다. 해외에서 비싼 자재를 들여오는 과정에서 수많은 건축업자가 파산했고, 송사도 여러 차례 벌어졌다. 동아일보가 1921년 7월 27일 자에 지지부진한 공사 상황을 보도하며 ‘기간이 10년이 넘었고 공사비도 30만 원 이상 들었다’고 적은 것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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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 지어진 3층 건물은 서울시내를 두루 조망하고 경복궁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6만6115㎡(약 2만 평) 부지에는 양관 외에 한옥 99칸과 자연숲, 능금밭, 연못, 하천도 있었다. 양관 뒤쪽 수성동 계곡에는 일양정 누각을 세워 손님 접대용으로 사용했고, 소실의 기와집과 딸의 양옥은 산장과 거리를 격한 채 따로 지었다(『오래된 서울』). 딸의 집이 현재의 박노수미술관이다. 세상은 윤덕영의 저택을 진시황의 ‘아방궁’에 비유하며 돈이 어디서 났는지를 궁금해했다(동아일보 1921년 6월 23일 자).
윤덕영의 돈은 매국의 대가였다. 그는 일제로부터 이완용보다 더 많은 사례를 받았다.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윤비가 치마폭에 숨기고 있던 옥새를 강제로 뺏어 건네줬다”는 소문이 파다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던 모리배였다. 동생 윤택영도 순종의 장인 신분을 앞세워 송현동 48·49번지에 집을 지었다. 경복궁을 가운데 두고 그 좌우에 형제가 땅을 소유했다(『오래된 서울』).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근대 정원 조영기법을 선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저택으로 기록된다. 양식 건물과 한옥이 공존함에 따라 각 건물 특성에 부합하는 정원 형태가 조영됐다. 양관에는 차량 동선을 고려한 정형적 정원을 도입했고, 한옥인 본채에는 후원과 연못을 만들었다. 붉은 벽돌과 화강석을 결합한 형태로 외장과 담, 기단을 꾸며 디자인의 통일성을 유지했다. 진입도로 양측에 은행나무와 벚나무를 열식하고 앞뜰은 잔디로, 경계부는 기존 수림대를 활용했다(김해경의 『벽수산장으로 본 근대 정원의 조영기법 해석』). 양관은 첨탑과 응접실 천장에 설치한 수족관 때문에 ‘뾰죽당’ ‘금붕어 집’ 등으로도 불렀다. 인왕산 중턱에 우뚝 솟아 이국적 풍취를 풍겨 1956년 작 ‘서울의 휴일’ 등 영화 배경으로 자주 이용됐다(『오래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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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장 건물은 당시 서촌 일대의 명물이었다. 고모와 조카 사이인 두 화가의 작품 속에도 담겼다. 나혜석(1896~1948)·나희균(1932~ ) 화백이다. 나혜석 화백이 1940년 오빠 나경석의 신교동 집에 잠시 머물 때 ‘별장’이라는 작품으로 그린 건물을 9년 후 여고생이던 나희균 화백도 화폭에 담았다. 크고 화려한 유럽 궁전 건물이어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갔을 터. 그만큼 존재감이 컸다. 나경석의 외손녀인 전수용(1954~ ) 한국문학번역원장도 “어린 시절 그 건물이 상상력을 자극하곤 했다”고 회상한다.
윤덕영은 산장이 완공되자 세간의 시선이 좋지 않음을 의식해 곧장 중국계 신흥 종교단체인 세계홍만자회 조선지부에 임대하고, 자신은 그 옆 한옥에서 살았다. 나라를 팔아 지었음에도 주인은 살아 보지도 못한 것이다. 벽수산장은 1940년 윤덕영이 사망하자 미쓰이광산에 매각됐다가 광복을 맞으면서 벽수병원, 6·25전쟁 당시엔 조선인민공화국 청사, 6·25전쟁 이후 유엔군 장교 숙소 등으로 변신을 거듭했다. 1966년 ‘언커크’ 시절 불이 나 2·3층이 타면서 폐허로 방치돼 있다가 1973년 6월 도시계획으로 철거됐다.
옥인동 47번지 일대에 맥락을 잃은 채로 남아 있는 벽수산장 정문 돌기둥과 현관 아치형 문의 흔적, 입구 다리의 난간석 등 잔해에서 구보는 이 공간이 품었을 시간의 기억을 생각한다. 화려했던 건물은 오간 데 없고 매국노가 품었던 욕망의 파편만 스산하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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