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현의 페르소나
‘아너’의 정은채, ‘정년이’를 잇는 중성적 카리스마
서구적 마스크 내세운 우아한 이미지 탈피
‘손 더 게스트’ 여형사부터 ‘정년이’ 문옥경까지
카리스마 무장한 독보적인 중성적 매력으로
고정된 성 역할 벗어난 ‘자신만의 색채’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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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계속. 뒤는 내가 감당할게.”
ENA 드라마 ‘아너: 그녀들의 법정(이하 아너)’에서 강신재(정은채)는 친구 윤라영(이나영)이 위협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향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밝혔을 때 그런 말로 친구의 선택을 지지했다. 여성 피해자들이 권력을 가진 가해자들의 위협 속에서 아무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현실에 맞서 싸우는 여성 3인방 변호사들의 이야기를 그린 ‘아너’에서 강신재는 로펌 L&J의 대표다. 여성 피해자를 변호하는 이들 역시 만만찮은 협박과 회유 속에 시달리는데, 그 안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버텨내는 이가 바로 강신재다.
그는 법조계의 엘리트이자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인물이지만 그 권력을 자신의 안위가 아니라 여성 피해자들을 위한 방패로 사용한다. 또한 두 차례의 이혼 경력을 숨기려 하기보다는 당당히 드러내는 높은 자존감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지만 그 카리스마는 타인을 압도하기보다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는 높은 도덕성에서 비롯한다. 지적이면서도 결단력 있는 행동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랄까.
최근 들어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 시선에서 가해자들과 싸우는 이른바 ‘피해자 정서의 서사’가 늘고 있다. 그간 보호받아야 할 피해자들이 오히려 2차 가해를 당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문제의식을 가진 작품들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아너’는 스웨덴 원작의 작품이지만, 이런 정서들을 밑그림으로 깔고 있다. 여기 등장하는 강신재를 비롯한 윤라영, 황현진(이청아) 3인방이 세운 피해자들을 위한 로펌 L&J의 이니셜은 리슨(Listen) & 조인(Join)으로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뜻이다. 그 로펌의 중심축인 강신재 역할의 정은채에게 부여된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은채는 이미 ‘정년이’에서 문옥경이라는 여성국극의 황태자 역할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준 바 있다. 그래서인지 그 연결선상에서 ‘아너’의 강신재라는 인물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정년이’의 문옥경이 여성국극에 나서는 정년이(김태리)를 이끌어주고 그 국극단의 든든한 허리 역할을 해줬다면 ‘아너’에서의 강신재도 “가 계속. 뒤는 내가 감당할게”라는 대사처럼 피해자들을 위해 싸우는 로펌의 친구들이 든든하게 기댈 수 있는 기둥이 돼줬다.
이것이 가능해진 건 정은채라는 배우가 가진 독보적인 중성적 매력 때문이다. 정은채는 세련됨과 절제미를 모두 갖춘 중성적인 면모를 통해 ‘정년이’에서는 ‘왕자님’이라는 수식어를 얻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배우로서의 색채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2010년 영화 ‘초능력자’와 드라마 ‘파스타’의 단역으로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지만, 정은채가 대중문화업계에서 주목받은 건 2013년 홍상수 감독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통해서다. 이 작품에서 프랑스의 배우이자 감독 겸 가수인 샤를로트 갱스부르를 동경하며 자유로우면서도 위태로운 청춘의 초상을 그려낸 정은채 배우는 신비롭고 청순하며 특히 도회적인 우아함을 가진 배우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큰 키와 서구적인 마스크, 그리고 낮고 조용한 말투는 기존 한국 여자 배우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이국적인 매력이었다. 하지만 정은채는 이러한 이미지에 고정되기보다는 그 틀을 깨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걸 선택했다. 2018년 OCN 작품 ‘손 the guest’를 통해서다.
이 작품에서 강길영이라는 강력계 형사 역할을 맡은 정은채는 이전까지 그녀에게 부여됐던 우아한 이미지에서 과감하게 탈피하는 파격적인 연기를 선보였다. 강길영이라는 인물이 정은채에게 중대한 변곡점을 준 이유는 기존 수사물 속 여성 형사의 전형성을 완전히 탈피한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감성적인 공감보다는 냉철한 이성을 드러내고 보호받는 존재가 아닌 온몸으로 악령과 맞서는 투사의 면모를 보여줬다. 특히 파트너인 고 형사(박호산)와의 관계에서 강길영은 오히려 무뚝뚝하고 강직한 모습을 보임으로써 남녀 형사의 고정된 성 역할을 뒤집었는데, 이것이 정은채 배우가 지닌 중성적인 매력이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 지점이다.
이 역할을 바탕으로 ‘정년이’의 문옥경이라는 압도적인 캐릭터가 가능했다. 여성 국극단의 남역 배우라는 이 역할을 그 누가 이처럼 멋지게 소화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정은채의 중성적 매력이 폭발했다. 짧게 자른 머리와 남성적인 슈트핏으로 설득력 있는 왕자님의 외형을 준비하고 들어온 정은채는 국극 연기에서도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너만의 방자를 찾아봐.” 작품 속에서 ‘춘향전’의 방자 역할을 맡은 정년이가 고민할 때 문옥경이 해준 그 말은 사실상 자신에게도 하는 말이 됐다.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색채를 지닌 연기의 아우라를 찾기 시작했다. ‘아너’의 강신재라는 인물은 바로 그런 노력의 산물이다. 여성들의 연대를 보여주면서도, 그들을 위해 기꺼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걸 서슴지 않는 강인한 면모가 정은채의 연기로 완성됐다.
고정된 성 역할은 우리 시대에는 점점 가능성을 제한하는 벽으로 인식되고 있다. 남성과 여성의 틀에 갇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으로 구분하는 역할은 각자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을 지워버린다. 그런 점에서 정은채가 보여주는 중성적 매력은 이러한 성 역할을 뛰어넘었을 때 어떤 가능성의 지대가 열리는가를 실증하는 면이 있다.
정은채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봤기에 많은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만의 색채를 지닌 배우로 남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기를 원하는 모든 이의 바람이 아닐까. 이것이 정은채의 페르소나가 현재에 특히 빛을 내는 이유일 것이다.
필자 정덕현은 대중문화평론가로 기고·방송·강연을 통해 대중문화의 가치를 알리고 있다. MBC·JTBC 시청자위원을 역임했고 백상예술대상·대한민국 예술상 심사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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