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운동화 끈을 조여 맨다. 가벼운 스트레칭 후 언덕을 향해 천천히 달린다. 언덕 위에선 임진강 물줄기가, 고개를 돌리면 북쪽을 향한 판문점 표지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하늘은 붉은빛으로 물든다. 그 빛은 더 길게 번져 북쪽을 향한다. 저 너머에서도 누군가는 지금 이 하늘을 보고 있을까.
풍경을 보며 천천히 발길을 돌리니 태극기 너머 저 멀리 북쪽 하늘의 인공기가 보인다. 그때마다 마음속에선 두 가지 감정이 올라온다. 군인으로서의 경계심과 ‘저곳이 아닌 여기서 태어나 다행이다’는 조용한 감사. 나는 안다. 그 감사가 타인의 곤경과 대비되면 미세한 안도로 기울고, 곧 우월감이 됨을. 하늘은 하나이고, 그 아래 길은 아직 둘이나 적어도 내 마음만은 어느 한쪽을 높이는 대신 둘 사이를 잇고 싶다.
호흡이 리듬을 찾자 근무지인 의무실 풍경이 떠오른다. 상처를 소독하고 봉합하는 것. 내가 다루는 것은 총이 아닌 손이고, 찢는 힘이 아닌 붙이는 힘이다. 봉합은 상처의 가장자리를 하나씩 맞대는 과정이다. 분단선도 언젠가 그런 법을 배울 수 있을까.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만큼 갈라진 자리를 정직하게 잇는 방법을.
분단의 경계 가까이서 달리다 보면 오늘의 평화가 통일보다 크게 다가온다. 나와 전우, 우리보다 앞선 선배 전우들이 이 선을 지킨 덕분에 이 땅의 모든 국민이 하루를 무사히 보낸다는 사실이다. 통일이 어떤 모양일지, 언제 올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누군가의 안전을 지키는 일의 필요성과 책임감은 분명하게 느낀다. 그래서 이곳에서의 애국심은 남다르다. 이 나라를 지키고 있다기보다 앞선 이들이 넘겨준 자리에 서 있다는 감각에 가깝다. 일정한 호흡으로 내딛는 발마다 가족의 평온이 올라와 앉는 것 같고, 그 무게만큼 감사와 책임이 따른다.
다리에 통증이 느껴지는 오르막에서 벼락바위 완전작전의 안내판을 스친다. 기억하는 일! 산 자로서 최소한의 책임이다. 망각은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책임을 놓는 일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지나쳐 버리는 존재로 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이 경계 위에서 자주 한다.
해가 더 기울고 마지막 코너를 돌 때 남쪽의 태극기와 북쪽의 인공기를 다시 본다. 순간 떠오르는 감사를 곧 책임으로 바꾼다. 이 손은 살리기 위한 것임을, 경계는 안전을 지키려는 것임을 오늘도 기억한다.
길은 아직 둘이지만, 하늘은 하나다. 임진강은 같은 방향으로 흐른다. 통일이 어떤 모습으로 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것만은 알고 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숨과 걸음, 봉합과 기록이 누군가가 기댈 수 있는 평화의 여백을 조금씩 넓혀 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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