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영화>> 제1차 세계대전 진창 속의 지옥, 파스샹달(2008)
감독: 폴 그로스
출연: 폴 그로스(마이클 던 상사), 캐럴라인 다버나스(사라 맨), 조 디니콜(데이비드 맨)
진흙탕 전투에 사상자 32만 명
피로 국가 자격 증명한 캐나다
승리 영광 뒤 가려진 참혹한 대가
비극 역사 속 인간성의 승리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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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는 시체 위에 누운 채로 밤을 보냈다는 걸 깨달았다. 양손을 시체 배 속에 넣은 채였다. 진흙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썩은 시체의 살이었다. 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쩐다? 손에 벤 상처라도 있었다면? 파상풍에 괴저병 등등.” 『그것은 참호전이었다 1914-1918』, 자크 타르디 지음, 서해문집 펴냄
전쟁 후 달라진 국가 위상
“국가는 때로 전쟁터에서 태어난다.”
캐나다가 그랬다. 역사가 피에르 버턴이 강조했듯이 캐나다인은 비미(프랑스 북부 제1차 세계대전 요충지)에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캐나다인이라고 느꼈다.
1914년 캐나다는 아직 완전한 나라가 아니었다. 1867년 영국으로부터 자치령 지위를 얻었지만, 외교권은 영국이 쥐고 있었다. 1914년 8월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캐나다는 자동으로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 스스로 결정한 참전이 아니었다.
당시 캐나다의 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인구 800만 명 남짓의 작은(?) 나라였고, 강대국들 눈에는 영국의 변방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독자적인 외교도, 독자적인 군 통수권도 없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캐나다군은 달랐다. 1917년 비미전투에서 연합군이 번번이 실패했던 요충지를 캐나다 4개 사단이 힘을 합쳐 점령했다. 캐나다는 더 이상 영국의 부속국이 아니었다.
1917년 7월 31일 영국군 사령관 더글러스 헤이그는 또 다른 대공세를 계획했다. 목표는 벨기에 이프르 동쪽의 파스샹달 능선이었다. 이곳을 점령하면 독일군의 잠수함 기지가 있는 벨기에 해안을 공격할 수 있었다. 제3차 이프르전투, 일명 파스샹달전투가 시작됐다.
헤이그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450만 발의 포탄을 독일군 진지에 쏟아부었다. 문제는 이곳이 습지대였다는 점이다. 포격으로 배수로가 파괴되고,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면서 전장은 진창으로 변했다. 병사들은 허리까지 차오르는 진흙탕을 헤쳐 나가야 했다. 전차는 진창에 빠져 움직이지 못했다. 부상병은 진흙 속에서 익사했다.
비미 승리 직후 캐나다군은 파스샹달의 진창으로 투입됐다. 그리고 또 한 번 막대한 피를 흘렸다. 1만50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다쳤다. 영국군 전체로는 약 32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3개월간 전투로 8㎞를 전진했다. 1918년 독일군의 대공세로 그마저도 다시 빼앗겼다.
전쟁이 끝나자 캐나다는 달라진 위상을 현실로 만들었다. 베르사유조약에서 캐나다는 영국의 속국이 아닌 독립된 국가로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국제연맹에도 자발적으로 가입했다. 마침내 1931년 웨스트민스터헌장으로 외교권과 군사권을 넘겨받으며 실질적인 독립국가가 됐다. 전쟁터에서 피로 국가의 자격을 증명한 것이다.
전쟁의 상처와 구원
영화 ‘파스샹달’은 캐나다 배우이자 감독인 폴 그로스가 조부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그의 조부는 실제로 이 전투에 참전했고, 살아남아 캐나다로 돌아왔다.
주인공 마이클 던 상사(폴 그로스)는 파스샹달전투 이전 솜전투에서 상처를 입는다. 그는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던 중 포격을 받아 참호에 매몰된다. 동료들이 그를 끄집어냈지만 심각한 트라우마가 남는다. 좁은 공간에서 느끼는 공포증, 밤마다 찾아오는 악몽, 갑작스러운 소음에 놀라는 과민반응. 이른바 ‘셸쇼크(Shell Shock)’에 걸린 것.
후송된 던은 캐나다 캘거리의 군병원에서 회복 중이었다. 그곳에서 간호사 사라 맨(캐럴라인 다버나스)을 만난다. 그녀는 던을 정성껏 돌본다. 던은 점차 안정을 되찾고 사라에게 마음을 연다. 하지만 그녀의 동생 데이비드 맨(조 디니콜)이 징병영장을 받는다. 데이비드는 천식이 있어 전투에 부적합했지만, 징병위원회는 그를 통과시킨다. 사라는 던에게 부탁한다. “동생을 지켜 주세요. 제발 살아서 돌아오게 해 주세요.” 던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사라의 눈물을 보고 결심한다. 그는 자원해 전선으로 복귀한다.
1917년 10월 던과 데이비드는 벨기에 이프르에 도착한다. 던은 캐나다 군단의 베테랑 상사로 새로운 소대를 맡는다. 영화는 이때부터 전쟁의 참상을 가감 없이 보여 준다. 참호는 물과 진흙으로 가득 차 있다. 병사들은 허리까지 물에 잠긴 채 서 있다. 쥐가 득실거리고, 시체가 진흙 속에 반쯤 묻혀 있다. 던은 데이비드를 보호하려 애쓰지만 쉽지 않다. 이윽고 파스샹달 능선을 향한 돌격이 시작된다. 포격이 멈추고 호루라기가 울린다. 병사들이 참호에서 나와 무인지대로 뛰어든다. 감독은 이 장면을 슬로모션과 일반 속도를 번갈아 사용하며 촬영했다. 기관총이 불을 뿜고 병사들이 쓰러진다.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익사하는 병사, 철조망에 걸려 꼼짝 못하다가 총에 맞는 병사, 포탄에 산산조각 나는 병사. 지옥이 따로 없다.
던과 병사들은 독일군 참호에 도달해 백병전을 벌인다. 총검으로 찌르고, 삽으로 내리치고, 수류탄을 던진다. 던은 독일군 장교를 죽이고 참호를 점령하지만 데이비드가 부상당하는데….
영화는 전쟁의 참혹함을 담담하게 그린다. 왜 싸워야 했는지도 모른 채 진창 속에서 죽어 간 젊은이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인간성은 살아남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려는 마음, 동료를 구하려는 희생. 그것이 지옥 같은 전쟁터에서 병사들을 버티게 한 힘이다.
셸쇼크, 1차대전이 남긴 보이지 않는 상처
제1차 세계대전은 전쟁 트라우마가 본격적으로 의학용어로 인식된 최초의 전쟁이었다. ‘셸쇼크(Shell Shock)’, 포탄 충격이란 뜻이다. 1915년 영국 심리학자 찰스 새뮤얼 마이어스가 의학저널 ‘랜싯’에 발표하며 처음 사용한 용어였다. 그는 참호에서 귀환한 병사들이 보이는 떨림, 악몽, 공황, 기억상실 같은 증상을 관찰했다.
처음엔 포탄 폭발의 물리적 충격이 뇌를 손상시킨 것으로 여겼다. 포탄에 직접 노출되지 않은 병사들도 같은 증상을 보였다. 점차 심리적 트라우마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당시 군대와 사회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셸쇼크는 ‘겁쟁이병’으로 치부됐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숫자는 급증했다. 1917년에는 영국군 전체 사상자의 약 7%가 셸쇼크 진단을 받았다. 군 지휘부는 당혹스러웠다. 대응방식은 가혹했다. 영국군은 셸쇼크 병사를 겁쟁이로 간주해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306명이 총살형을 당했다. 2006년에야 영국 정부는 이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사면했다. 치료방법도 제각각이었다. 일부 의사는 전기충격 치료를 시도했다. 환자에게 고압 전류를 흘려 ‘정신을 차리게’ 하겠다는 발상이었다.
셸쇼크는 시간이 지나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제2차 세계대전에선 ‘전투 피로(Combat Fatigue)’, 6·25전쟁에서는 ‘작전 소진(Operational Exhaustion)’, 베트남전쟁에선 ‘전쟁 후 신경증(Post-Vietnam Syndrome)’이라고 했다. 1980년에야 비로소 의학계가 공식 명칭을 정했다. PTSD,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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