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장기 위에 그린 조국 독립의 열망 힘차게 나부끼네

입력 2026. 03. 05   15:16
업데이트 2026. 03. 0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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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 곳>>서울 진관사, 태극기를 숨긴 절집 

고려 승려 진관 수행하던 암자로 시작
현종 자신 숨겨준 은혜 보답 위해 증축
조선 태조는 왕실 소유의 원찰로 지정
세종 집현전 학자 보내 한글 창제 매진
임시정부와 교류 독립운동 거점 역할
칠성각 보수하다 3·1운동 태극기 발견

진관사 가는 길에 도열한 태극기.
진관사 가는 길에 도열한 태극기.

 

서울 은평구 진관사는 조계사의 말사이다. 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여 있어 경관이 빼어나다. 구보는 북한산 응봉능선을 타고 내려와 깊고 맑은 삼천사계곡에서 발을 씻은 후 찾곤 한다.

진관사는 고려 초 지어진 고찰로 역사가 깊다. 6·25전쟁 때 소실됐다가 1964년부터 당우 재건을 거듭해 오늘에 이른다. 원래 진관(津寬)이라는 승려가 홀로 수행하던 신혈사(神穴寺)라는 작은 암자로 시작했다. 그러다 경종비 헌애왕후이자 목종의 모후인 천추태후(964~1029)가 자매인 헌정왕후의 아들 대량원군 왕순을 아들의 경쟁자로 여겨 신혈사로 보내 승려로 만드는데, 주지 진관의 도움으로 왕순이 위기를 모면하고 8대 현종에 오르면서 고마움의 표시로 신혈사를 증축, 진관사로 거듭나게 했다. 사찰의 존재 덕에 동네 이름도 진관동이 됐다. 고려조 내내 왕들이 행차해 참배하고 시주했다(『고려사절요』).

숭유억불 정책을 기조로 내세웠던 조선 개국 초기에도 태조 이성계가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를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왕실 소유의 원찰로 지정했다. 4대 명찰인 이 사찰들은 왕실 조상의 근영을 모시고 기도하는 곳이기에 유림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진관사 태극기와 백초월 스님.
진관사 태극기와 백초월 스님.

 

조선은 회암사를 수법도량(修法道場)으로, 진관사는 수륙도량(水陸道場)으로 지정하고 비용을 대줬다(『진관사수륙재조성기』). 당연히 태조의 거둥(擧動·임금의 나들이)이 잦았다(『태조실록』, 6년 1월 28일·9월 24일·7년 1월 6일 등). 태종도 즉위년에는 1월과 10월에 이곳에서 수륙재를 베풀었으나 이후에는 신하들을 보내 치르게 했다(『태종실록』). 수륙재는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고혼들과 굶어 죽은 아귀를 천도하는 의례다. 유교를 받들고 불교를 억압하던 숭유억불의 조선에서 공인된 유일한 불교의례로 6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음력 9월 ‘수륙대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다.

진관사는 한글 창제의 산실 역할도 했다. 1442년 세종은 유림의 눈을 피해 집현전 학사 6명(박팽년·성삼문·신숙주·이개·이석형·하위지)을 진관사에서 비밀리에 사가독서하게 해 한글 창제에 매진하도록 했다.

수륙대재에 오르는 각종 음식이 한국 산사음식의 정수로 평가받음에 따라 경내에 ‘산사음식 연구소’가 마련돼 있다. 국내외 요리사들이 사찰음식 연구를 위해 자주 찾고 있다. 진관사 스님이 외국에서 우리 전통 음식을 소개하는 행사도 갖고 있다.

구보는 진관사로 향하는 마실길 초입에 도열해 선 태극기들을 처음 보던 순간 특이함을 느꼈었다. 이 절이 사찰음식뿐만 아니라 태극기 관련 일화를 품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그 사연은 흥미로웠다.

태극기가 보존돼 있던 진관사 칠성각.
태극기가 보존돼 있던 진관사 칠성각.

 

진관사는 2009년 5월 26일 기미독립운동 90주년을 맞아 1907년 건립한 칠성각을 보수하다 불단 뒷벽에서 3·1운동 당시 사용한 태극기를 발견해 주목받았다. 당시 뉴스를 접하고서 구보는 만세운동의 상징인 태극기와 북한산 깊은 산속 진관사를 잇기가 힘들었다. 가로 89㎝, 세로 70㎝ 크기로 일장기 위에 먹으로 태극을 만들고 건곤감리의 사괘를 그려 제작한 낯선 태극기였다. 왼쪽 상단 모서리가 소실된 상태라 비장미를 더했다. 불에 타 훼손된 부분에서는 그 태극기를 스쳐간 억압과 저항의 시간들이 진하게 감지됐다.

1919년 발행된 19점의 독립운동 관련 신문들도 함께 발견됐다. 신대한, 독립신문, 조선독립신문, 자유신종보, 경고문 등이었다. 문화재청은 모든 출토물을 고증한 후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 신채호가 1919년 10월 28일 창간한 신대한에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흐름과 국내 독립운동 기사, 그리고 조선총독부 초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부음 기사와 성토, 경성법원의 독립운동가 재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 검거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던 수원 기생 김향화의 가출옥 기사 등을 실었다.

조선독립신문은 천도교가 1919년 3월 1일 발행한 지하신문으로서 3·1 만세운동을 상술하고 있다. 경고문은 친일 세력을 거명하며 그들이 펼치려는 자치론을 비판하고 있다. 나머지 사료들에는 1919년 개별 사찰의 항일 독립운동 참여 상황과 상하이 임시정부와 국내 불교계 관계가 수록돼 있었다(박석홍 문화재위원). “우리 태극기를 오늘 다시 보았네 자유의 바람에 태극기 날리네 2000만 동포야 만세를 불러라.” ‘태극기’라는 제하의 권두시도 감동을 더했다. 구보는 누군가가 오늘날의 타임캡슐처럼 1919년 당시의 사건들을 먼 훗날에 실어 나르고 싶어 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진관사 칠성각 내부 불상. 뒷벽에서 태극기가 발굴됐다.
진관사 칠성각 내부 불상. 뒷벽에서 태극기가 발굴됐다.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가 됐다. 고(故) 한철호 동국대 교수는 진관사 태극기를 “우리 사찰에서 최초로 발견됐고, 진관사가 상하이 임시정부와 적극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배후 거점 역할을 했다는 사료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역사적 고증을 거친 진관사 태극기는 2021년 10월 25일 국가보물로 지정됐다.

이 과정에서 진관사 백초월(1878~1944) 스님이 진관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펴다 1919년 1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직전에 이 태극기와 사료들을 숨겼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진관사가 당시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의 서울 연락본부였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대동단은 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던 1919년 3월 의친왕 이강, 궁내부 대신 김가진, 일진회 회원 전협과 최익환 등 민족대표 33인이 서울에서 비밀리에 결성했다. 1919년 의친왕을 상하이 임시정부로 망명시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계획을 짜 실행에 옮겼다. 사전작업을 위해 대동단 총재 김가진(1846~1922)과 전협이 먼저 상하이로 가서 안창호 국무총리에게 협조를 요청했으나 기차로 망명에 나섰던 의친왕 일행이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돼 실패했다.

대동단은 ‘1919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삼는다’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11월 28일 제2의 만세운동을 일으켜 독립운동의 기치를 높게 들었다. 대동단원들은 옥고를 치렀다. 백초월 스님도 33인 대표로 활동했다. 스님은 만해 한용운이 만세운동으로 체포되자 ‘승려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으는 등 한용운에 버금가는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승려였다. 1940년에 이어 1943년에도 투옥돼 1944년 옥중 순국했다. 한용운도 같은 날 입적했다(『나무위키』).

6·25 당시 폭격으로 칠성각을 제외한 진관사 모든 전각은 소실됐다가 1963년 복원됐다. 구보는 칠성각이 피해를 받지 않은 덕분에 기미년에 불타올랐던 민족의 얼이 오롯이 전승될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긴다. 사진=필자 제공

진관사 전경.
진관사 전경.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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