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신처, 신앙을 지켜온…

입력 2026. 03. 05   17:25
업데이트 2026. 03. 05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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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인문학 - 두 도시 이야기 
튀르키예 카파도키아와 일본 나가사키<下>

중국·백제 등 다른 세상과 만나던 통로, 유럽 문물 받아들이며 일본 기독교 중심지로… 
막부의 잔혹한 박해 피해 ‘숨은 기독교인’ 250년간 불교 신자인 척 은밀하고 치밀하게 믿음 이어가
대표 음식 나가사키 짬뽕·덴푸라·카스텔라…근현대 ‘섞임의 역사’ 대변

 

나가사키의 음식은 여느 일본과 다르다. 개방과 쇄국이 교차하며 만들어 낸 역사의 일부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먹던 튀김이 ‘덴푸라’로 남았고, 네덜란드 상인이 남긴 설탕과 달걀이 ‘나가사키 카스텔라’로 전해졌다. 중국 유학생들에게 한 끼의 온기를 나누기 위해 끓인 수프는 ‘짬뽕’이 됐다. 일본의 근현대사가 한데 겹친 나가사키의 사연마다 음식이 하나씩 태어났다.

 

나가사키 외곽 작은 마을에도 뿌리내린 성당은 이 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깊이 스며 있음을 증명한다. 필자 제공
나가사키 외곽 작은 마을에도 뿌리내린 성당은 이 지역에 가톨릭 신앙이 깊이 스며 있음을 증명한다. 필자 제공

 

도교사원과 중화요리점이 즐비한 신치 중화거리. 마치 중국의 한 도시를 옮겨 놓은 듯하다. 필자 제공
도교사원과 중화요리점이 즐비한 신치 중화거리. 마치 중국의 한 도시를 옮겨 놓은 듯하다. 필자 제공

 

나가사키의 명물 짬뽕. 필자 제공
나가사키의 명물 짬뽕. 필자 제공


나가사키에서 태어난 짬뽕

나가사키의 첫인상은 조용했다. 항구를 따라 늘어선 산비탈의 집들, 조용히 오가는 노면전차, 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이 평온하게 어우러졌다. 일본의 여느 소도시보다 고요했지만 도심 안으로 들어설수록 격변의 흔적이 드러났다.

나가사키는 규슈지방에 속한다. 한반도, 중국과 가까워 일찍부터 백제를 비롯한 다른 세상을 만나던 통로였다. 17세기 일본 막부는 서양은 물론 중국과의 교역도 나가사키에 한정했다. 규슈 전역에 퍼져 있던 중국 상인들이 한순간에 몰려들었다. 한때 나가사키 인구의 6분의 1을 차지할 만큼 많은 숫자다 보니 식탁 위엔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잘 아는 ‘나가사키 짬뽕’이다.

이 음식은 19세기 말 나가사키에서 공부하던 가난한 중국 유학생들을 위해 태어났다. 화교 식당 주인이 이국땅에서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학생들을 안타까워하며 남은 식재료를 모아 한 냄비에 넣고 끓였다. 그렇게 탄생한 나가사키 짬뽕은 일본의 식재료와 중국의 조리법, 항구도시 특유의 넉넉함이 어우러져 나가사키의 대표 음식이 됐다.

우리도 나가사키 중화식당에 앉아 한 그릇 시켜 봤다. 짬뽕은 빨간 국물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나가사키 짬뽕은 우리가 알던 색과 맛이 아니었다. 하얀 국물에 알싸한 매운맛이 났다. 해산물의 신선한 맛과 돼지고기의 진한 기름기가 조화를 이루면서 양까지 푸짐한 한 끼였다.


과거 개항을 압박하던 서구의 증기선. 현재는 나가사키 관광상품이 돼 항구에 정박해 있다. 필자 제공
과거 개항을 압박하던 서구의 증기선. 현재는 나가사키 관광상품이 돼 항구에 정박해 있다. 필자 제공


서양을 향해 문이 열린 항구와 덴푸라

중국인이 이곳으로 모여든 배경에는 포르투갈이 있다. 1549년 포르투갈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상단과 함께 규슈 가고시마에 상륙했다. 유럽 종교가 인도 고아를 거쳐 처음 일본에 전래된 순간이었다. 규슈지역 영주들은 포르투갈 무역선을 통해 조총을 얻었고, 유럽의 문물을 배우기 위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1580년 나가사키 영주가 도시를 예수회에 헌납하면서 나가사키는 일본 기독교의 중심지가 됐다.

이후 나가사키에 교회와 신학교가 세워졌다. 많은 주민이 개종했고, 거리에는 라틴어 찬송가가 울려 퍼졌다. 일본 남쪽 끝에 유럽의 한 마을이 옮겨 온 듯했다. 당시 유럽은 사순절 동안 육류 섭취를 금해 대서양에서 잡힌 대구를 육류 대용으로 먹었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동양에 와서도 사순절을 지키기 위해 채소와 생선을 튀겨 먹었고, 일본인이 이를 따라 만들었다. ‘사순절 기간 동안’을 뜻하는 라틴어 ‘아드 템포라 콰드라게시마(Ad tempora quadragesima)’에서 유래한 ‘덴푸라’는 이렇게 탄생했다. 

당시 덴푸라는 두꺼운 밀가루 반죽을 입혀 튀기는 포르투갈 전통요리에 가까웠지만 현대의 일본인은 얇고 바삭한 튀김옷으로 바꿔 식재료 본연의 맛을 살렸다. 신선한 새우, 오징어, 가리비를 껍질째 튀긴 해산물 덴푸라에서 기름 맛보다는 바다의 향기가 느껴졌다. 채소 덴푸라는 기름에 잠기지 않고 속까지 바삭함을 유지했다. 덴푸라의 고향 나가사키에서 그 맛을 보고 한동안 다른 도시의 덴푸라는 성에 차지 않았다.

먹던 평화의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독교 확장을 두려워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리고 나가사키 니시자카 언덕에서 26명의 기독교인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당시 유럽과의 무역 이익을 노리던 정치적 계산, 종교적 불안이 뒤얽혀 있던 상황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도시가 기독교와 완전히 결별하는 계기가 됐다.

순교지 기념성당 앞에는 발이 땅에 닿지 않고 공중에 들려 있는 순교자 26명을 새긴 청동부조가 있다. 안내문을 읽으며 당시 상황을 상상하니 소름이 돋았다. 교토와 오사카에서 끌려온 신자들은 귀와 코가 잘린 채 800㎞를 걸어 이곳에 도착해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공개 처형당했다. 일본 최남단 항구까지 끌려온 이유는 분명했다. 막부는 외국 상인들 앞에서 신자들을 처형함으로써 ‘일본에서 기독교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가장 빨리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동시에 가장 철저히 배제한 도시가 됐다. 포르투갈 선교사들은 추방당했고, 신앙은 자취를 감췄다.

 

나가사키를 휩쓸고 간 신앙의 폭풍과 박해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는 니시자카 언덕의 26성인 순교 기념비. 필자 제공
나가사키를 휩쓸고 간 신앙의 폭풍과 박해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는 니시자카 언덕의 26성인 순교 기념비. 필자 제공

 

네덜란드 상관이 자리했던 인공섬 데지마는 쇄국 시절 일본이 유럽의 문명을 바라봤던 단 하나의 창문이었다. 필자 제공
네덜란드 상관이 자리했던 인공섬 데지마는 쇄국 시절 일본이 유럽의 문명을 바라봤던 단 하나의 창문이었다. 필자 제공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빵 카스텔라. 필자 제공
나가사키를 대표하는 빵 카스텔라. 필자 제공

 

네덜란드의 설탕이 나가사키 카스텔라가 되기까지

에도막부를 세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다. 박해는 더욱 체계적이고 잔혹해졌다. 배교를 거부한 이들은 처절한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신앙을 버리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막부는 이를 색출하고자 성화를 밟는 ‘후미에’를 실시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이가 신앙을 버렸다. 하지만 일부는 불교 신자인 척하며 신앙을 이어 갔다. 바로 ‘가쿠레 기리시탄’, 숨은 기독교인이다.

그들의 삶은 치밀했다. 마리아상을 관음보살로 위장해 조각했고, 불교 의례에 참여하면서도 천주에게 기도했다. 집 앞에 특정 식물을 심거나 창문에 천을 거는 방식, 물건을 팔 때 쓰는 단어나 손짓으로 서로를 확인했다. 세대를 거치며 뜻은 사라졌지만 라틴어 기도문을 일본어 음차로 구전하며 250년간 이어 왔다.

포르투갈 가톨릭 선교사가 떠난 자리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차지했다. 막부는 “서양의 기술과 상품은 이용하되 기독교 포교만큼은 한 치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표했고 선교에 관심이 없던 그들은 장사만 하겠다고 약속했다. 막부는 이도 부족했는지 네덜란드 상단을 나가사키 앞바다의 인공섬 데지마에 가둬 두고 한정적인 교역을 이어 갔다. 그제야 서양 문물과 무역 이익을 유지하면서 포교를 막을 수 있게 돼 만족했다. 데지마로 유입된 의학·과학·언어 등은 ‘화란(和蘭)’의 학문, ‘난학(蘭學)’이라고 불렀다. 네덜란드의 한자 표기가 화란이다. 일본은 200년 동안 쇄국정책을 유지했지만 난학과 서양 물자로 근대화의 씨앗을 심을 수 있었다.

데지마에 갇힌 채 한정된 상업 활동으로 생존해야 했던 네덜란드 VOC 무역상품 중 설탕이 있었다. 설탕은 은화만큼 높은 가치를 지녀 일종의 ‘화폐’처럼 취급됐다. 인도네시아와 대만에서 설탕을 가져와 일본의 은과 바꿨다. 네덜란드 이전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남기고 간 음식 중 덴푸라도 있지만 ‘카스티야의 빵’ 카스텔라도 남아 있다. 설탕과 달걀이 극도로 귀했던 시절이어서 상류층만이 즐길 수 있는 최고의 사치품이었다. 네덜란드에서 설탕이 유입되면서 일본 제빵사들은 여기에 물엿을 추가하고 바닥에 굵은 설탕을 깔아 일본 특유의 촉촉하고 바삭한 ‘나가사키 카스텔라’로 완성했다. 일반적인 카스텔라와 다른 점은 깔끔한 단맛이다. 설탕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단 1g도 허투루 쓰지 않고 계량해 만든 정확한 단맛이었다. 어느 한 곳 치우친 맛 없이 고르게 익은 카스텔라는 입에서 천천히 녹았다.

 

 

오우라 천주당은 200년 박해를 견딘 ‘숨은 기독교인’을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냈다. 필자 제공
오우라 천주당은 200년 박해를 견딘 ‘숨은 기독교인’을 다시 세상 밖으로 불러냈다. 필자 제공


원폭이 떨어진 성당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250년 만에 나가사키 항구를 개항시켰다. 다시 외국 상선들이 찾아오고 이들을 위한 오우라 천주당이 건립됐다. 이때 나가사키 북부 우라카미 마을의 주민 10여 명이 성당을 찾아왔다. 신부는 몇 가지 질문을 주고받은 뒤 그들이 250년간 숨어 지낸 기독교인의 후손임을 알아챘다. 메이지유신 이후 신앙의 자유가 완전히 허용되면서 신자들이 숨어 살던 지역은 상징적인 공간이 됐다. 이를 기념하고자 성당을 세웠다. 그러나 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이 우라카미 성당을 직격했고, 신앙의 중심지는 한순간에 폐허가 됐다. 숨었던 신앙이 겨우 모습을 드러낸 순간 또 다른 폭력이 덮친 것이다. 기독교 박해와 원폭이라는 두 겹의 폭력을 동시에 품은 장소가 바로 우라카미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이 있었다. 현재 우라카미 성당은 재건됐는데, 원폭에 무너진 종탑이 정원 한구석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원폭 피해자의 울부짖음과 기도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녹아내린 종, 부서진 성상의 머리, 뒤틀린 십자가는 종교적 박해와 전쟁이 어떻게 한 도시에 겹쳤는지를 생생히 보여 줬다.

나가사키는 ‘섞임’의 역사다. 대항해시대가 열리며 포르투갈, 네덜란드, 미국의 배들이 차례로 찾아왔다. 포르투갈 선교사들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인 동시에 가장 혹독하게 배척했다. 서양을 막으면서도 데지마라는 좁은 창으로 서양 물자를 받아들이고, 난학을 배우며 서양 의술을 갈구했다. 세계와의 교역, 그 뒤에 따른 박해와 회복이 반복된 역사의 땅이다. 나가사키는 층층이 쌓인 역사 속에 인간의 존엄을 묻었다. 군함도의 어두운 해저 탄광과 나가사키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이름 없이 쓰러진 조선인 징용공도 있다. 그들은 타인의 땅에서 박해와 폭력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던 이 도시에 새겨진 또 다른 아픔이다.

나가사키는 평온하다. 노면전차가 흐르듯 도시를 달리고, 사람들은 조용히 일상을 이어 간다.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만 발걸음을 멈춘 채 이 땅 위에 서린 슬픔을 돌아볼 뿐이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필자 김은덕·백종민은 여행작가다. 부부가 함께 쓴 공저로 『여행 말고 한달살기』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 등이 있다. 유튜브 ‘띵크띵스’도 운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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