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의 양 아닌 판단의 질…신호와 잡음을 구분하라

입력 2026. 02. 25   16:33
업데이트 2026. 02. 25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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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군사명저를 찾아서>>로버타 월스테터 『진주만: 경고와 결정』

Roberta Wohlstetter. 1962. 『Pearl Harbor: Warning and Decision』. Stanford University Press. pp. 426.
진주만 기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분석한 이 책의 본질은 군사정보 실패와 전략적 의사결정의 구조를 해부한 연구에 가깝다. 이 책은 1962년 출간 이후 정보연구와 전략연구 분야에서 고전으로 자리 잡았으며 오늘날까지도 군사 전문가들이 반복적으로 인용하는 대표적인 연구로 인정받고 있다.


왜 일본의 기습을 막지 못했는가?

저자의 핵심 질문은 단순하다. 미국은 일본의 공격을 사전에 탐지할 수 있는 정보와 징후를 상당 부분 확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기습을 막지 못했는가라는 것이다. 저자 월스테터는 이 질문에 대해 음모론이나 특정 지휘관의 무능이라는 단순한 설명을 거부하고 정보환경과 조직적 의사결정 구조라는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제시했다.

저자가 제시한 가장 중요한 분석 틀은 ‘신호(signal)와 잡음(noise)’ 개념이다. 당시 미국은 일본 외교 전문 암호 해독, 군사 동향 보고, 통신 감청, 정찰 정보 등 다양한 정보를 확보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외교관들에게 미국과의 협상이 실패할 경우 일정 시점 이후 문서를 파기하라는 지시를 내린 사실은 명백한 위기 신호였다. 또한 일본 항공모함 기동부대 위치를 알려주던 함대 간 교신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는 평시에도 흔히 나타나는 수많은 군사 활동 보고 속에 섞여 있어 결정적 공격 징후로 식별되지 못했다. 월스테터는 정보 실패의 본질이 정보 부족이 아니라 정보 과잉 속에서 의미 있는 신호를 구별하지 못한 데 있다고 강조한다. 이는 오늘날 정보·감시·정찰(ISR) 자산이 폭증한 현대 군사 환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통찰이다.

진주만 기습은 정보판단의 오류로 인해 올바른 경보를 울리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이는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분석적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본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USS 애리조나호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진주만 기습은 정보판단의 오류로 인해 올바른 경보를 울리지 못한 대표적 사례다. 이는 정보 부족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의중을 읽을 수 있는 분석적 상상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일본 항공기의 공격을 받고 침몰하는 USS 애리조나호 모습. 출처=위키피디아


특히 저자는 진주만 기습 이전 미국 정보기관이 일본의 공격 가능성을 완전히 간과했던 것이 아니라 공격 방향을 잘못 판단했다고 설명한다. 당시 미국 전략가들은 일본이 동남아시아 자원 확보를 위해 필리핀, 말레이시아,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을 공격할 가능성을 높게 평가했다. 이는 군사적으로도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일본이 장거리 항모작전을 통해 하와이를 공격하는 것은 위험 부담이 큰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기습이라는 비대칭적 전략을 통해 초기 전력 우위를 확보하려 했다. 여기서 나타나는 중요한 교훈은 상대방의 합리성 모델을 자국 기준으로 판단할 경우 전략적 오판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과정에서 억제의 실패가 발생했다. 진주만 기습의 가장 중요한 시사점은 억제가 객관적인 군사력 균형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인식과 판단 구조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보여줬다는 점에 있다. 1941년 미국 지도부는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자살 행위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억제가 작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본은 장기전 승산이 낮다는 점을 인식하면서도 초기 기습을 통해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고 협상에서 유리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고 계산했다. 즉, 양측 모두 나름의 합리성에 기반한 판단을 내렸지만 합리성의 기준 자체가 달랐던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억제 실패가 비합리성 때문이 아니라 상이한 전략적 인식 구조와 오판에서 발생한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이는 이후 핵억제 이론에서 상대 인식, 전략문화, 위험감수 성향을 분석하는 연구로 발전했으며, 억제가 결정론적 메커니즘이 아니라 확률적 현상이라는 인식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완전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저자는 또한 ‘경보는 예측(prediction)이 아니라 판단(judgment)’이라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정보기관이 미래를 정확히 맞히는 것은 불가능하며 중요한 것은 불확실성을 관리하면서 정책결정자가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군사작전 환경에서 완전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으며, 지휘관은 항상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낯선 것이라 해도 있을 법하지 않은 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의 서문을 쓴 토머스 셀링은 “낯선 것과 있을 법하지 않은 것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기존 생각과 맞지 않는 정보를 가능성이 없는 일로 치부함으로써 심각한 판단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잘못된 판단의 사례는 일본 외교 암호 해독 정보의 처리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워싱턴에서는 일본과의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하와이 현지 지휘관들에게 전달된 정보는 제한적이었다. 정보 공유 체계의 비효율성과 보안 중심 문화가 상황 인식 공유를 저해했던 것이다. 또한 현지 지휘관들은 하와이 거주 일본인에 의한 사보타주(파괴) 위협에 더 큰 관심을 뒀고, 항공기들을 활주로 근처에 밀집 배치하는 결정을 내렸다. 미 항공기들이 한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에 공습 피해를 극대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례는 위협 인식의 우선순위 설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조직적 측면에서 보면 육군과 해군의 협조 부족도 중요한 원인으로 지적된다. 정보는 분산돼 있었고 통합된 상황 인식이 형성되지 못했다. 이는 오늘날 합동성(jointness)과 통합지휘체계가 강조되는 이유를 설명하는 역사적 근거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 군사에서 C4ISR 통합이 강조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경험 때문이다.

정보보다 분석과 가정이 더 중요

이 책의 또 다른 가치는 ‘전략적 기습’의 본질을 설명했다는 점이다. 기습은 단순히 정보 부족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우리의 예상 틀을 벗어난 선택을 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기습 방지는 정보 수집 능력보다 ‘분석적 상상력’과 ‘가정 재검토 능력’에 달려 있다. 즉, 정보 실패는 개인의 무능이나 음모가 아니라 구조적 문제로 설명했다. 이는 전문군사교육 측면에서도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조직은 실패 원인을 개인에게 전가하면 학습이 이뤄지지 않지만 구조적 원인을 규명하면 제도 개선이 가능해진다. 월스테터의 분석은 ‘조직 학습’의 중요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일을 사후적으로 평가할 때 흔히 나타나는 사후확증편향(hindsight bias)의 위험성도 강조된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는 당시 존재했던 여러 정보와 징후들이 마치 명백한 경고 신호인 것처럼 보이기 쉽지만, 실제 당시 상황에서는 그러한 정보가 수많은 배경 정보 속에 섞여 있었고, 그 의미를 확정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즉, “왜 미리 알아채지 못했는가”란 질문은 사건 이후의 결과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제기되는 것이며, 이는 당시 의사결정 환경의 불확실성과 정보의 불완전성을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저자는 이러한 인식 오류가 정보 실패를 과장하거나 특정 개인이나 조직의 무능으로 단순화하는 잘못된 평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결론적으로 『진주만: 경고와 결정』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정보분석과 전략경보 연구의 고전이다. 정보가 많을수록 실패 가능성도 증가할 수 있다는 역설은 정보폭증 시대인 오늘날 더욱 울림이 크다. 전략적 기습을 방지하는 핵심은 정보의 양이 아니라 분석의 질이며, 조직적 가정을 지속적으로 재검토하는 지적 훈련이라는 점을 이 책은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군사전략 연구자와 정보 분야 실무자 모두에게 필독서로 평가할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필자 최영진은 국방전문가로 전쟁사, 전략론, 정신전력, 병력구조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필자 최영진은 국방전문가로 전쟁사, 전략론, 정신전력, 병력구조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현재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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