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복에서 교복까지 떡볶이 코트의 위엄있는 족보

입력 2026. 02. 23   16:04
업데이트 2026. 02. 23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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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 - 더플코트

벨기에 소도시 더플의 모직에서 시작
英 해군, 바다 추위 견디려 외투로 착용
장갑 끼고도 옷 여미도록 토글·끈 고안
2차대전 영웅 몽고메리가 입으며 유명
오늘날 교복 위 기본템으로 자리매김

 

겨울이면 학교 앞에서 후드가 달린 토글단추 여밈의 두꺼운 무채색 코트를 자주 보곤 한다. 이 코트를 우리는 ‘더플코트(duffle coat)’라고 부른다.

 

더플코트는 ‘몬티 코트’라는 별칭이 있는데, 영국 야전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오른쪽)가 이 외투를 자주 착용한 데서 붙여졌다. 필자 제공
더플코트는 ‘몬티 코트’라는 별칭이 있는데, 영국 야전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오른쪽)가 이 외투를 자주 착용한 데서 붙여졌다. 필자 제공



‘더플코트’라는 이름은 신성로마제국 브라반트공국(오늘날 벨기에 브라반트 지방)의 소도시 더플(Duffel)에서 출발한다. 15세기 중반 더플 인근 직조업자들은 두껍고 촘촘한 모직 천을 짜고, 수축 공정으로 결을 눌러 바람을 막아주는 옷을 만들었다. 거칠고 묵직한 질감이 특징이었던 이 천은 곧 주변 지역에서 겨울을 나는 옷가지의 재료로 채택된다.

16세기 후반 제국 내 치열해진 종교 갈등이 결국 내전을 불러일으켰고, 개신교 신자들을 북쪽으로 내몰았다. 북독일 지역을 떠난 복음교회(루터파) 신자들은 북유럽에 정착했다. 남쪽 저지대(벨기에)를 떠난 개혁교회(칼뱅파) 신자들은 홀란트 백작령(오늘날 네덜란드)의 레이던으로 이주해 훗날 근대 시민의 특징이 되는 근면함과 성실, 그리고 그들이 떠나온 더플의 직물 기술을 전파한다.

한편 제국을 상대로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1588년, 스페인과의 갈등으로 자주권을 위협받고 있던 잉글랜드 왕국은 그들과 힘을 합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칼레와 그하블린느 앞바다에서 격퇴했다. 이 두 전투를 통해 네덜란드는 독립전쟁 자금 조달의 큰 축인 해상무역을 지켜낼 수 있었고, 잉글랜드는 바다를 지키기 위한 해군력의 중요함을 다시 한번 인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먼저 유입된 개혁교회(칼뱅파)가 강조한 근면함과 성실함은 네덜란드의 상업과 금융 경쟁력을 크게 증진시켰다. 긴 전쟁 끝에 독립을 쟁취한 네덜란드는 자주국으로서 그 경쟁력을 십분 발휘해 북해와 대서양 무역을 장악한다. 그들의 대양 무역은 거리와 상관없이 대륙과 대륙을 바로 연결했다.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은 동방의 향신료와 신대륙의 설탕, 국산 직물과 선박자재를 모두 취급했다. 유럽 시장은 네덜란드의 범해양적 상업 네트워크가 제공한 가격과 속도로 재편됐으며, 네덜란드의 바다는 더 이상 간척지 부근에만 머물지 않았다.

가톨릭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잉글랜드는 네덜란드의 금융시장과 국채 신용을 통한 전쟁자금 조달력을 학습해 모방하고 스코틀랜드와의 국가 통합을 추진하며 내부를 정돈해 나갔다. 영국은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까지 110년에 걸쳐 네덜란드를 상대로 ‘앵글로-더치 전쟁(Anglo-Dutch Wars)’을 네 차례 치렀다. 무역거점을 기반으로 한 패권 전략과 해군력을 중심으로 한 무역 통제 전략의 충돌이었다. 영국이 이 긴 전쟁에서 승리하며 해상 패권은 무역거점이 아닌 해군력 중심으로 옮겨간다. 더플 천도 같은 흐름을 탔다. 찬바람과 겨울을 버티는 두꺼운 모직 천은 해상 노동과 항해 생활에서 필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며 더플이라는 직물 이름은 점차 외투 이름으로도 쓰이기 시작한다. 재단사는 더플 천을 잘라 실용 외투를 만들었는데, 그 형태는 기능을 따라 다양했다. 추운 날 손이 시리면 장갑을 낀다. 장갑 낀 손은 작은 단추를 만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굵은 끈과 토글이 등장했다. 후드는 머리와 뒷목을 한 번에 덮는 효율적인 역할을 했다. 1820년대 이후 유럽에서는 후드가 달린 폴란드 군복 프록코트가 유행했다. 이 외투는 토글과 후드를 결합했고, 병사는 야외에서 그 코트를 착용했다.

1880년대 영국에서는 이 폴란드의 군용 프록코트 디자인을 차용해 만든 외투가 유행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더플코트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더플코트는 주로 해상 환경에 따라 일정한 형태를 유지하며 규격화됐다. 이제 직물 이름은 완전히 외투 이름으로 불렸고, 이후 후드와 토글이 달린 이 외투가 거리에서 점점 더 자주 보이기 시작했다.

1885년, 발칸반도 진출이 좌절된 러시아가 동진하고 남하하며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항구와 해협을 노리던 시기였다. 영국은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해 인근 항로와 보급로 장악을 묵시적으로 선언한다. 바야흐로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영국과 러시아가 나폴레옹 전쟁 이후 근 1세기에 가깝게 다툰 지정학적 경쟁) 막바지였다. 세계지도 위 점 하나가 함대 운용을 좌우했고, 그 해역 함대의 유니폼 규격도 바꿨다.




19세기 말 영국 해군은 북대서양과 북태평양 북단 등 고위도 환경에 맞는 갑판용 외투를 새로 찾았다. 이 시기 해군성은 1890년대 이 외투를 대량으로 주문해 지급했다. 거점 점령을 위한 보병수송선을 호위하는 항해에서 수병은 이 코트를 입었고, 사람들은 이를 보고 별명으로 ‘컨보이 코트(convoy coat·호송외투)’라 불렀다. 길이는 무릎 근처까지 내려와 허벅지를 가렸고, 해상 근무에 어울리는 차분한 톤의 컬러가 많았다. 이 시점부터 더플코트는 전형적인 해군 정규외투로 자리 잡았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더플코트를 해군 외투에서 군별을 가리지 않는 제복으로 만든다. 더플코트는 갑판만이 아니라 야전에서도 큰 쓰임을 얻었다. 바람이 센 해안, 비가 잦은 전선, 사방이 탁 트여 강한 바람이 부는 활주로, 밤 경계 근무에서 장병들은 후드를 올리고 앞여밈을 잠갔다. 이때 더플코트는 ‘몬티 코트(Monty coat)’라는 별칭도 얻었는데, 영국 야전사령관 버나드 몽고메리가 이 외투를 자주 착용한 사진이 알려지며 붙은 별명이다.

육·해·공을 망라한 총력전을 거치며 더플코트의 길이는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짧아졌으며, 후드는 크기를 조정해 머리 위에서 잘 맞도록 조정됐다. 토글은 세 개에서 네 개로 증가하기도 했고, 끈 길이도 보다 잡기 쉬운 규격이 된다. 전쟁이 끝나자 군 창고에 남은 더플코트는 민간 시장을 통해 다시 대중에 널리 유통됐다.

학생과 청년들은 이 저렴하고 멋있으며 심지어 따뜻한 외투를 즐겨 입었다. 1951년 설립된 브랜드 글로버올(Gloverall)은 1950년대 초 전후 군 잉여재고를 사들여 팔았고, 1954년부터는 더플코트를 자체 생산했다. 이 코트는 가죽 고리, 토글, 체크 안감으로 군용보다 더 다양한 디테일의 적용으로 디자인의 변화를 가져오며 학생과 도시인의 겨울 외투로 자리 잡았다. 글로버올은 전후 군 잉여품 유통에서 출발해 1954년 더플 표준을 만들었고, 지금도 오리지널 몬티(Original Monty)와 같은 라인을 판매한다. 오리지널 몽고메리(Original Montgomery)는 해군 납품 전통을 내세우며 클래식 더플을 고집한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더플코트를 ‘떡볶이 코트’라고도 부른다. 앞여밈에 달린 나무 토글과 끈이 떡볶이 떡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 학생들은 이 코트를 교복 위에 걸쳤고, 이후 롱패딩과 다운 재킷이 학생들의 겨울을 장악했지만, 교복 매장 한쪽에는 지금도 더플코트가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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