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강경읍, 포구에서 보낸 하루
근대의 시간 겹겹이 쌓인 골목
토굴에서 고요하게 익는 젓갈
강경에서 돈 자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충남 논산시 강경읍. 지금은 금강 변의 조용한 마을이지만 조선 시대에는 평양·대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전국 3대 시장이 서는 곳이었다.
서해에서 금강을 거슬러 올라온 배들이 이곳 포구에 닿았고, 호남평야의 곡식이 강경을 거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사람과 물자가 몰리니 돈도 돌았다. 1910년에는 상업 도시에만 둔다는 한일은행 지점까지 강경에 들어섰을 정도다.
철도가 뚫리면서 뱃길의 시대는 끝났고, 포구는 조용해졌다. 단 한 가지 젓갈만은 남았다. 냉장 기술이 없던 시절, 쏟아지는 수산물을 오래 보관하려 소금에 절이기 시작한 것이 강경 젓갈의 출발점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도 강경포 어선들이 청어와 조기를 잡아 소금으로 ‘어염’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수백 년간 다듬어진 염장 기술은 지금도 강경의 토굴 안에서 고요히 숙성되고 있다.
2025~2026년 충남 방문의 해를 맞아 논산 일대가 조금씩 활기를 되찾고 있는 지금, 강경의 골목과 시장을 걸어볼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젓갈백화점… 토굴 갖춘 상점만 100여 개 즐비…손맛 제대로네
강경젓갈시장은 노점이 줄지어 선 전통시장과는 다르다. 상점마다 대규모 토굴 저장 시설을 갖추고, 일 년 내내 발효 상태가 고른 젓갈을 내놓는다. ‘젓갈백화점’이라는 별칭이 허투루 붙은 게 아니다. 토굴은 연중 온도가 일정해 젓갈이 과발효되거나 변질될 위험이 적다. 우리나라에서 이만큼 다양한 젓갈을 한곳에 모아놓은 곳은 여기가 유일하다.
어느 상점이든 웬만한 종류는 취급한다. 새우젓, 멸치젓, 황석어젓 같은 김장 필수품부터 창난젓, 꼴뚜기젓처럼 밥반찬으로 바로 올리는 종류까지. 가격대도 대체로 평준화돼 있으니 눈에 드는 곳 하나를 골라 시식부터 시작하면 된다. 용도를 말하면 상인이 알아서 맞춰 준다.
젓갈백반… 공깃밥 두 그릇 순삭, 입맛 터지겠네
젓갈에 입문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젓갈백반이다. 시장 인근의 여러 식당이 젓갈백반을 내놓는다. 주문하면 한 상에 16종의 젓갈이 깔리는 것이 특징이다. 오징어젓, 명란젓은 당연히 있고, 명태무침·낙지젓·어리굴젓이 차례로 따라온다. 종류가 많으니 한 점씩만 집어도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젓갈마다 짠맛과 감칠맛의 농도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짠맛이 누적될 즈음 담백한 된장찌개와 부드러운 누룽지가 입안을 정리한다. 공깃밥 한 그릇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두 그릇째를 비우고 나서야 수저를 내려놓게 된다.
강경 골목… 발 닿는 거리마다 100년의 시차, 역사 살아있네
밥을 먹었으니 걸을 차례다. 강경 골목엔 상업 도시의 전성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다. 한일은행 강경지점 건물을 활용한 강경역사관이 출발점이다. 지역 주민들이 수십 년간 간직해온 물건들이 모여 있고 삼거리 일대의 옛 거리를 재현한 사진 자료가 벽면을 채운다. 뒤편으로 이어지는 강경구락부는 구한말 강경의 번화가를 입체적으로 복원한 공간이다. 카페, 양과자점, 호텔이 근현대사 테마파크처럼 엮여 있어 1920년대 거리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골목 사이사이에는 일제강점기 적산가옥도 숨어 있다. 기와 처마의 각도, 현관 구조가 한옥과 미묘하게 다르다. 발길 닿는 대로 느리게 걷는 것이 이 동네를 즐기는 방식이다. 골목 투어가 끝날 즈음 강변으로 나서면 ‘강경산 소금문학관’이 눈에 들어온다. 논산 출신 박범신 작가의 소설 『소금』을 모티브로 강경의 정체성을 문학적으로 풀어낸 공간이다. ‘소금이 썩지 않게 하듯, 문학이 세상의 부패를 막는다’는 메시지를 곱씹으며 통창 너머 금강을 조망할 수 있다.
종교사에서도 강경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1896년 국내 최초의 침례교 예배가 옥녀봉 꼭대기의 ㄱ자 초가집에서 열렸다. 인천과 강경을 오가며 포목 장사를 하던 지병석 씨의 집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 조선 땅에서 처음 미사를 집전한 곳도 강경이다. 옥녀봉 근처에는 이를 기념하는 성지와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침례교와 천주교 양쪽에 기원을 가진 동네라니. 포구 마을치고는 이력이 범상치 않다. 해 질 무렵 옥녀봉에 오르면 이 모든 이야기가 금강 물줄기와 함께 붉게 물드는 장관을 볼 수 있다. 논산 8경 중 하나로 꼽히는 낙조다.
탑정호 출렁다리… 호수 위 600m의 산책, 풍경 아찔하네
옥녀봉의 기도 소리를 뒤로하고 이제는 자연이 내어주는 여백을 찾아 이동한다. 강경에서 차로 20분, 논산시 부적면의 탑정호다. 충남에서 두 번째로 큰 이 저수지에 2021년 출렁다리가 놓였다. 길이 600m, 주탑 높이 46m. 국내 호수 출렁다리 중 가장 긴 규모다. 대부분의 출렁다리가 산속 계곡에 걸리는 것과 달리 이곳은 수면 위에 놓여 있어 사방이 트인다. 발 아래로 잔잔한 물결, 바람이 불 때마다 살짝 흔들리는 바닥판. 아찔한 감각과 탁 트인 조망이 동시에 들어온다. 겨울 탑정호는 고요하다. 여름의 인파가 걷힌 호수 위로 차가운 바람과 맑은 수면만 남는다. 해 질 무렵에 맞춰 가면 미디어 파사드 조명이 호수 위로 번지면서 낮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입장료 없이 누구나 걸을 수 있고, 반려동물도 케이지를 이용하면 함께 입장할 수 있다.
백제군사박물관… 계백 황산벌 전투 재현, 제법 볼만하네
출렁다리에서 차로 5분이면 백제군사박물관이다. 660년 황산벌 전투,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로 신라 5만 대군에 맞선 바로 그 자리 위에 세워졌다. 백제의 군사 문화와 호국정신을 주제로 전시가 구성돼 있는데 전투 과정을 재현한 영상물이 제법 볼만하다. 계백 장군의 묘소와 그의 사당 충장사가 바로 옆이라 관람 후 함께 둘러보면 동선이 자연스럽다. 탑정호 수변데크길과 연결돼 호숫가를 따라 걸으며 이동하는 것도 가능하다.
같은 부적면에 딸기향농촌테마공원도 있다. 전국 딸기 생산량의 15%를 담당하는 논산답게 설향·금실 등 품종별 재배 온실과 가상현실(VR) 체험관, 딸기 모양 놀이기구가 있는 사계절 놀이터, 로컬푸드 직매장이 갖춰져 있다. 2월 말은 딸기 수확이 한창인 시기다. 직매장에서 갓 딴 논산 딸기를 바로 살 수 있다. 설향 품종 특유의 진한 단내가 겨울 언 땅을 녹일 듯 비닐하우스 밖까지 퍼진다. 입안 가득 터지는 과즙은 봄이 머지않았음을 미각으로 확인시켜 준다. 2027년 논산세계딸기산업엑스포를 앞두고 관련 시설도 확충 중이라 다음에 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일 수 있겠다.
서울에서 차로 2시간 남짓. 천안논산고속도로 서논산 IC에서 강경까지 10분이다. 2025~2026년 충남 방문의 해를 맞아 논산 일대의 관광 인프라를 정비 중이기도 하다. 겨울 끝자락, 아직 찬 바람이 불지만 탑정호 주변 딸기 하우스에서는 이미 봄이 시작되고 있다. 강경의 포구 골목을 걷고, 젓갈 한 통 품에 안고 돌아오는 하루. 화려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 자꾸 떠오르는 종류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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