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평화를 통역한다

입력 2026. 02. 12   14:52
업데이트 2026. 02. 12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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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캐나다의 푸른 상공을 비행하던 조종사였다. 안락한 미래가 보장된 직업이 있었지만, 마음속 비행계획서의 목적지는 늘 대한민국이었다. 국외 영주권자로서 조국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오랜 다짐은 대한민국 국가대표 한빛부대의 일원이자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나를 척박한 오지로 이끌었다. 비행기 조종간을 잠시 내려놓고 국방의 의무를 선택한 지금, 이 숭고한 길의 의미는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이곳에서 나의 주특기는 항공기를 조종하는 일이 아니다. 통역 임무를 맡고 있다. 인도 유학과 캐나다 영주권자로서 쌓아 온 외국어 실력은 다국적군에 대한 깊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유엔 평화유지군과 대한민국 군을 잇는 소통의 가교가 되고 있다.

유엔군 작전회의에서 용어 하나가 어긋나면 현장에서는 불필요한 긴장으로 번질 수 있다. 이동 경로, 시간, 지원 범위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 하나가 잘못 전달되면 불신이 생기고 주민 보호와 지원 활동이 늦어질 수 있다. 한빛부대를 대표한다는 사명감으로 문장 하나, 단어 하나를 끝까지 확인하며 유엔의 일원으로서 모두 원팀이 되도록 돕는다. 이 과정은 때로 통역을 넘어 실질적인 군사외교관 역할이 수반된다. 서로 다른 절차와 문화를 이해시키며 ‘왜 그렇게 하는지’를 설명하는 순간 협력은 훨씬 매끄러워진다.

작전 회의의 긴장된 공기 속에서도 남수단 현지 주민들과 마주하는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이들의 맑은 눈망울 뒤에 숨은 두려움, 어른들의 짧은 한숨에 담긴 생계의 무게가 언어로 전해진다. 그들의 이야기를 정확히 전달하고 우리의 지원의지를 분명히 전할 때 현장은 한 걸음 더 안전해진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이 ‘평화와 희망’이라는 하나의 목적 아래 소통하는 순간이다.

현재 한국군과 유엔의 다국적군이 함께 수행하는 남수단의 생명줄, 주보급로(MSR) 보수작전 현장에 있다. 화려한 신년 축제도, 가족과 따뜻한 식사도 할 수 없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임무를 이어 가는 전우들의 숨소리가 그 빈자리를 든든히 채워 준다. 우리는 ‘평화’라는 이름의 무게를 알고 있다. 그래서 더 조용히, 더 철저히 서로를 믿으며 임무에 임한다.

파병 중반부를 넘어선 지금 캐나다와 한국에 있는 사랑하는 가족이 유독 그리워진다. 안정된 삶을 뒤로하고 입대해 파병까지 온 나를 믿고 기다려 주는 가족을 향한 사랑과 감사함은 나날이 커져 간다. 한빛부대 통역병으로서 세계 평화를 연결하는 가교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나와 전우들이 수호하는 평화의 기운이 고국의 모든 분께 닿기를 소망한다.

김건우 상병 남수단재건지원단(한빛부대)
김건우 상병 남수단재건지원단(한빛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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