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아가씨의 애달픈 노래, 목포의 자부심이 되었네

입력 2026. 02. 12   14:52
업데이트 2026. 02. 1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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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그때 그 곳>>목포, 이난영의 공간 

이난영 19세에 ‘목포의 눈물’로 스타덤
‘남도 판소리 가락의 한 담았다’ 평가
트로트를 가요 주류 장르로 편입시켜
삼학도 중턱에 유해 안장 공원 조성

유달산서 내려다본 삼학도와 목포항 근대화 거리. 사진=필자제공
유달산서 내려다본 삼학도와 목포항 근대화 거리. 사진=필자제공

 

우리 대중가요의 초기 성장은 서울뿐만 아니라 목포·부산·평양·대구·군산·인천 등 지방 도시에서도 진행됐는데 그 가운데서도 목포가 가장 활발했다. 오랜 서편제의 고장인 데다 20세기 들어 목포 위상이 커진 까닭이었다. 1876년의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로 1897년 목포가 개항하면서 부산·인천·원산 등과 4대 항구를 이뤘고, 국도 1호와 호남선 철도 개통이 더해져 전국 6대 도시에 올랐다. 세관에 이어 영사관이 들어서고 부대시설로 경찰서와 우체국, 동양척식회사 그리고 학교·병원·교회·상가·주택·창고 등이 연이어 생겨났다. 

노적봉 자락 영사관 아래서부터 목포항까지는 일본 색채가 완연했다. 목포시는 이 지역을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했다. 상업과 무역이 목포를 견인하면서 도시를 대규모로 탈바꿈시켰다. 부두에는 일본으로 실려 가는 쌀과 목화·소금·김 등이 넘쳐났다. 경제 활성화에 힘입어 서구처럼 극장 공연이 유입됐다. 목포극장과 평화관은 영화 상영뿐 아니라 공연 공간으로서도 기능하며 지역 문화생활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이런 바탕 위에 1935년 목포 출신이 팀을 이뤄 내놓은 노래 하나가 얹히면서 도시를 더욱 활성화했다. 그 노래 ‘목포의 눈물’은 지금껏 목포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작사가와 작곡가, 가수가 모두 목포 출신이었다. 조선일보 향토민요 모집에서 뽑힌 문일석의 노랫말에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이난영이 부른 이 노래는 목포의 드높은 자부심이 됐고,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호남의 노래로 정착됐다. 구보는 프로야구 출범 2년째이던 1983년 호남 연고인 해태타이거즈가 우승하자 관중석에서 울려 퍼지던 ‘목포의 눈물’을 기억한다. 이 D단조의 서러운 노래가 호남의 정서를 대변하던 순간이었다.

목포항 맞은편 삼학도 중턱에는 디바 이난영(1916~1965)과 그녀의 노래를 기념하기 위한 공원이 마련돼 있다.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 등의 노랫말이 적힌 석비들이 비치돼 있다. 표지판에는 ‘목포의 눈물’이 당시 ‘5만여 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달성했다’고 쓰여 있다. 노래비 뒤 배롱나무 아래에는 그녀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경기 파주에 있던 것을 2006년 옮겨왔다. 공원의 센서가 사람을 감지해 곡을 들려준다. 1973년 매립돼 더 이상 섬이 아니지만, 삼학도는 이난영의 노래 속에서 여전히 섬이다.

이난영. 출처=목포문예역사관
이난영. 출처=목포문예역사관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시 아롱져진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서해에서 영산강으로 진입하던 돛배들과 사공은 삼학도의 일상적 풍경이었고,

도시가 커져 이동이 잦다 보니 연인과의 이별은 다반사였다.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임진왜란 때 군량미가 풍부한 것처럼 보이도록 유달산 세 개 봉우리를 짚으로 둘러싸서 위장한 일화도 가사에 담았다. ‘저항의 노래’였다(『20세기 한국 대관』). 발표 당시 ‘삼백 년 원한이 무어냐’는 당국의 질문에 작곡가 손목인이 ‘삼백연 원앙풍’이라고 답하며 ‘연못에 원앙풍이 불어와 편안하기를 바라는 뜻’이라고 둘러대 검열을 통과했다는 일화를 낳았다(『한국가요사』).

이난영은 가난 탓에 모친과 함께 제주도로 건너갔다가 태양극장 극장주의 눈에 띄어 14세 때부터 막간 가수로 노래를 시작했다. 1932년 삼천리 가극단에 채용되고, OK레코드에 발탁돼 19세 때 ‘목포의 눈물’을 불러 일약 스타 탄생을 이뤘다. “남도 판소리 가락의 한을 담았다”는 평을 받을 정도로 조선 대중의 정서와 잘 맞았다(『노래 백 년사』).

‘목포의 눈물’은 가요사에서 트로트를 주류 장르로 진입시킨 곡으로 인정받는다. 이 노래의 등장으로 고복수·백년설·남인수 등이 ‘타향살이’ ‘나그네 설움’ ‘황성옛터’ 등으로 견인하던 초창기 우리 가요가 탄력을 받았다. 당시는 신민요를 권번 출신 기생 가수들이 SP 판에 취입해 유성기로 전파하던 시기였는데, 이난영의 트로트가 치고 들어간 양상이었다.

‘목포의 눈물’ 노래비와 이난영 장지. 사진=필자제공
‘목포의 눈물’ 노래비와 이난영 장지. 사진=필자제공

 

트로트는 1912년 미국에서 생겨나 일제 강점기 유입된 ‘폭스트롯(Foxtrot)’이 그 어원인데, 여기에 클래식, 엔카, 스탠더드팝, 재즈 등이 가미됐다. 그 시작은 남도민요였다. 남도민요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널리 보급되면서 대중화의 길을 걸었다. 1894년 호남지역 관의 탐학에 맞서 봉기한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녹두장군’ 전봉준을 위해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고 부른 ‘파랑새’가 그 효시로 이야기된다(『한국가요사』).

남도민요는 서양 리듬을 빌려 쓰는 등 차츰 멜로디의 변화를 꾀하면서 ‘신민요’로 발전했다. ‘노들강변’ ‘희망가’ ‘사의 찬미’ 등이 대표적이다(『신민요와 대중가요』). 2006년 구보는 민요 취재차 남도를 다니면서 노인들이 이 신민요를 부르는 걸 자주 목격했다. 일상과 신문물을 소재로 한 구전 민요들이었다. 이 신민요가 우리 대중가요의 주축으로 자리 잡았다. ‘목포의 눈물’도 트로트와 신민요, 재즈가 섞인 장르로 분류된다.

이난영은 동향 작곡가 김해송(1911~?)과 결혼 후 1939년 ‘다방의 푸른 꿈’도 히트시켰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풍 블루스곡이었다. 당시는 다방이 대중음악 전달에 큰 역할을 했는데 목포의 다방들마다 이 흥미로운 리듬의 곡을 틀었다(『목포 문화사』). 구보는 ‘근대화골목’을 걸으며 재즈 선율이 다방마다 흘러나오던 당시를 상상하며 걷는 재미를 만끽한다. 뉴올리언스와 목포가 똑같이 재즈를 즐겼던 것이다. 구보는 재즈가 흐르는 1930년대 후반의 목포라는 설정에서 낭만을 느낀다. 슬픔과 아픔을 딛고 태어난 노래여서 더욱 의미가 깊다고 여긴다. 의지는 진흙탕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법인 까닭이다. 연꽃은 역경을 딛고 일어선 그 출생 과정 때문에 더 귀하게 여겨진다. 이난영은 일제강점기 목포 대중음악의 연꽃이었다. 지역과 음악을 결합한 덕에 전 시민이 그녀의 팬이 됐다. 목포가 한국 대중음악사에 중요한 뿌리 역할을 한 것이다. 이난영의 딸들은 김시스터즈를 결성해 미국에서 활동하며 성가를 높였다.

구보는 요즘 일고 있는 트로트 붐이 대중적 감수성에 부응하려는 트로트의 노력에 따른 결실일 것으로 여기며 한국 트로트의 오늘을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한 남도와 목포, 그리고 이난영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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