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를 건너 이어진 숫자

입력 2026. 02. 11   14:31
업데이트 2026. 02. 11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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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에는 오랫동안 기억돼 온 숫자들이 있다. 176과 766, 1325다. 처음에는 단순한 기수 번호라고만 생각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숫자들은 한 개인의 청춘을 넘어 한 시대의 책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할아버지는 해병대 병 176기로, 6·25전쟁 이후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 해병대2사단 5여단에서 복무하셨다.

훈련환경과 장비는 지금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열악했지만, 할아버지는 그 시간을 특별하게 이야기하지 않으셨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해병이었을 뿐이라고 담담히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 짧은 한마디에는 당시 세대가 감당해야 했던 책임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병 766기로 해병대2사단 8여단에서 복무하셨다.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든 이후였지만, 해병대라는 선택이 결코 가벼웠을 리 없다.

아버지는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해병대를 선택했다고 하셨다. 힘들었던 훈련과 군 생활을 이야기하실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으셨지만, 그 절제된 태도에서 ‘해병’이란 이름이 요구하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현재 나는 우리 가족의 세 번째 해병으로 복무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우연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이 선택은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두 세대를 거쳐 전해진 이야기는 해병대가 어떤 곳인지 설명하기에 앞서 해병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먼저 가르쳐 줬다.

176기와 766기, 지금 나의 기수 1325기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왔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각자 자리에서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해병대는 언제나 국가수호의 선봉에 서 있었고, 그 자리는 늘 책임을 받아들인 이들의 결단으로 채워져 왔다. 지금 그 결단이 이어져 온 시간 위에 서 있다.

특히 교육훈련단에서 보낸 시간은 나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전투수영, 각개전투, 천자봉 고지 정복훈련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으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완주한다는 것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과정을 거치며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걸어가신 길 위에 서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뭉클하기도 했다.

가족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해병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다시 생각한다. 언젠가 우리 집에 또 하나의 숫자가 더해질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들 숫자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책임의 역사라는 사실이다. 그 연속선상에서 해병으로서 맡은 하루를 묵묵히 이어 나가겠노라고 빨간 명찰에 굳게 다짐한다.

지종국 이병 해병대교육훈련단
지종국 이병 해병대교육훈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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