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창작뮤지컬 ‘판’
전통 연희장치에 올라타고 관객 호응은 필수
마당극 호흡에 현대적 감성, 정치풍자까지…
물리적 무대 한계 인형극으로 해소
박력 있는 넘버에 관객 어깨춤 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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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을 열어 둔 것 같았던 밤, 창작뮤지컬 ‘판’은 객석에 불을 댕겼다. 핫팩보다 뜨끈한, 등짝 지지기 좋은 안방 아랫목 같은 ‘이야기’의 불이다.
‘판’은 2016년 리딩을 거쳐 2017년 초연 이후 재연·삼연(2018)·사연(2021)·오연(2023)을 지나 지난해 12월 23일부터 올해 3월 8일까지 대학로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 코튼홀에서 6번째 시즌으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시대는 19세기 말 조선. 서민들 사이에서 권세를 풍자하는 패관소설이 퍼지자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를 중심으로 금서 수거와 소각 명령이 떨어진다. 이런 숨 막히는 분위기 속에서 부잣집 도련님 달수는 우연히 세책가 앞에서 마주친 미모의 여성 이덕에게 홀딱 반하게 되고, 그녀가 드나드는 매설방 ‘춘섬플레이스’로 발길이 향한다. 거기서 달수는 혓바닥 하나로 천하 여인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희대의 전기수(소설을 낭독하는 전문 이야기꾼) 호태를 만나 금지된 이야기의 ‘맛’을 알게 된다. 급기야 호태를 따라다니며 낭독의 기술을 배우고, 이야기판의 한복판으로 들어선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성장담+로맨스+시대극’인데, ‘판’은 그 틀을 곧장 뒤집는다. 이 작품을 보기 전 줄거리를 읽어 두는 건 말리진 않겠지만 딱히 권장하고 싶지는 않다. 지도만 보고 여행을 다녀온 것처럼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막상 현장에 서면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마당극의 호흡, 옴니버스처럼 병렬로 펼쳐지는 이야기, 거기에 현대적 감성까지 듬뿍 토핑했다. “이 정도면 다 보여 줬지?” 싶을 때마다 작품은 슬쩍 새로 닦은 도마를 꺼낸다. 멜로와 코믹으로 잘 달리다가도 정신을 번뜩 차려 보면 어느새 날카로운 정치 풍자의 판이 벌어져 있는 식이다. 더 놀라운 건 그 전환의 이음매다. 관객이 눈치채기 전 이미 리듬이 넘어가 있다.
‘판’은 이야기의 힘을 말로 설득하지 않고 무대에서 직접 증명한다. 전기수의 말 한마디, 산받이의 추임새, 관객의 호응이 서로 물리며 공기 같은 장단을 만든다. 관객 참여 장면은 배우들의 서비스가 아니라 작품 구조에 붙어 있는 관절이다. 이 작품은 이야기가 말하는 사람만의 몫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반응으로 함께 완성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관객석은 안전한 구경의 자리가 아니라 ‘공범석’에 가깝다. 금서를 함께 즐기고, 같이 웃고, 다 함께 혀를 차며 흉흉한 세상을 향한 감각을 공유한다.
전통 연희장치가 이야기의 흐름에 올라타는 순간 무대의 인상이 확 달라진다. 인형극과 꼭두각시놀음, 가면극은 “전통요소를 넣었어요” 수준의 장식이 아니다. 말로만 하면 밋밋해질 수 있는 풍자와 욕망을 한 번 더 비틀어 관객의 웃음을 뽑아내는 철저히 계산된 장치들이다. 특히 외줄타기 장면을 인형극으로 풀어내는 대목은 무대예술만이 가능한 환상으로 직행한다. 물리적 한계를 뒤춤에 감추지 않고 인형극만이 가능한 표현으로 방향을 튼 선택이 ‘판’의 배짱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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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들은 신명과 메시지를 동시에 쥐었다. 관객의 어깨를 풀어 주던 초반 판을 여는 흥겨운 곡이 후반으로 갈수록 점점 ‘웃음의 칼끝’을 세운다. ‘어둠의 마법사들’과 ‘새가 날아든다’는 이 작품의 대형 넘버다. 6명의 배우가 동시에 뿜어내는 박력이 장면을 단번에 규정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강점은 하나의 이야기만을 직선으로 밀고 가지 않는 구성에 있다. ‘판’은 현실과 이야기,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가 또 다른 이야기로 진입하는 액자식 흐름을 취한다. 각각의 판은 독립된 재미를 지니면서도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나란히 놓인다. 이 병렬 구조 덕분에 작품은 특정 인물의 성장담에만 머물지 않는다. 달수와 이덕의 관계, 매설방 사람들의 생존방식, 권력 풍자와 농담이 번갈아 등장하는 동안 관객은 어느 한쪽에만 기대지 않고 판 전체를 바라보게 된다.
배우들은 이 난장이 요구하는 호흡과 리듬을 정확히 짚고 있다. 전기수 호태는 웃기다가 멈추고, 멈췄다가 다시 웃기는 식으로 능숙하게 판을 굴린다. 매설방 주인 춘섬은 능청과 통찰을 두 손에 쥔 채 판을 깔고, 이덕은 ‘읽고 베끼는 사람’에서 ‘쓰고 꿈꾸는 사람’으로 서서히 옮겨 간다. 호태의 김지훈, 춘섬의 박은미가 각별히 반가웠다. 두 사람은 또 다른 한국 창작뮤지컬의 간판작 ‘빨래’ 멤버이기도 하다. 어지간한 뮤지컬 팬이라면 김지훈의 ‘빵’ 연기를 보지 못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박은미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 2023년 시즌에서도 춘섬을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2024년 ‘벤자민 버튼’의 블루 역을 잊지 못하고 있다.
‘판’은 웃음으로 문을 열고 풍자로 방향을 틀어 간다. 금서를 둘러싼 설정은 과거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무대 위에서 오가는 말은 자꾸 ‘지금’을 겨눈다. 이 작품은 영웅의 서사를 낭독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대신 이야기를 막아도 다시 만들어 내고, 말할 수 없어도 다른 방식으로 전해 온 평범한 사람들을 들려주고 보여 준다. ‘판’은 그 평범한 이야기의 힘을 믿는다. 그 믿음이야말로 이 공연을 성립시키는 가장 단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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