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러일전쟁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금계’
메이지유신으로 군사력 더 막강해진 日
청나라·조선 차지하려 러 제국과 충돌
러, 뤼순항 선제공격 당해 군사력 손실
불안정한 정치상황·미숙한 지휘 더해져
쓰시마해전서 5시간 만에 함대 궤멸
무능·부패 러 당시 사회분위기 반영
푸시킨 시 소재 오페라로 불만 표현
17~18세기 서유럽은 베스트팔렌조약에 따른 근대국가체제 형성과 산업혁명 확산, 미국의 독립, 프랑스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대두 등 격변의 시기를 거쳤다. 하지만 아시아에선 일본만이 메이지유신을 단행하면서 근대화 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이런 결과는 힘의 불균형을 초래했고, 언젠가는 터질 것 같은 화약고로 작용했다.
그때까지 아시아의 중심국가였다가 쇠퇴한 청나라는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먹잇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건륭제 말기에 시작된 매관매직 및 부패, 아편 유입에 따른 경기 침체는 청나라가 근대화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결정적 이유였다. 특히 1840년과 1856년 두 차례의 아편전쟁에서 패하며 반식민지화됐다.
개항을 서두른 일본은 서구 문물·체제를 받아들여 1868년 마침내 메이지유신을 단행했다. 그 결과 산업 발전이 가속화하고 서유럽과의 무역이 성행하면서 국력이 신장됐다. 신무기로 무장해 대륙과 원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군사력도 갖췄다. 이때 조선은 오히려 외세와 접촉을 차단하면서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등 시대를 역주행하고 있었다.
|
청나라의 쇠퇴…러시아의 남하와 일본의 대륙 진출
1904~1905년에 치렀던 러일전쟁은 쇠퇴하고 낙후된 청나라와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충돌이었다. 특히 1894년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놓고 싸운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시모노세키조약을 맺었다. 청나라는 조선에서의 영향력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랴오둥반도를 일본에 할양해야 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더욱 강력해진 군사력을 바탕으로,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며 만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고 랴오둥반도의 부동항(뤼순·다롄)을 확보하려는 전략에 차질이 생겼다. 결국 러시아로선 일본의 팽창을 견제해야만 했다. 독일, 프랑스와 협력해 삼국간섭을 이끌며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반환하도록 했다. 그 대가로 러시아는 1898년부터 뤼순항을 조차(租借·특별한 합의에 따라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영토 일부를 빌려 일정한 기간 통치하는 일)해 주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반의 상황은 만주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이 충돌할 수밖에 없는 불씨가 됐다.
러시아의 용암포 강제점령과 일본의 ‘만한교환론’
1900년 베이징에선 의화단이 활동하면서 외세 배척을 주장하며 외국 공관을 포위하고 공격했다. 이는 오히려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프랑스 등이 군대를 주둔시키는 계기가 됐다. 러시아는 만주지역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약 20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1903년에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를 점령하고 대한제국에 조차를 요구하는 등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이는 1895년에 있었던 을미사변 때 고종 황제가 러시아공관으로 피신했던 것과 연결돼 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1902년 영국과 동맹을 맺고 유사시 상호지원을 약속했다. 러시아에는 ‘만한교환론’, 즉 러시아에 만주를 양보하는 대신 대한제국을 차지하는 것을 서로 묵인하자는 제안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러시아의 거절로 만주는 물론 대한제국까지 확보하려는 의도가 드러난 셈이다. 전쟁이 불가피해지자 일본은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일본으로선 러시아의 극동군이 약 10만 명에 불과하고 본토에서 극동까지의 보급선이 너무 길어 전쟁 수행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완공 전이 적기라고 봤다.
일본의 뤼순항 선제공격과 만주 봉천전투
1904년 2월 8일 야간 마침내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부산과 마산에 대기 중이던 해군을 전개해 선제공격을 단행했다. 일본의 구축함과 어뢰정은 뤼순항에 접근해 정박 중이던 러시아 극동함대의 전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격멸하고 항구를 봉쇄했다. 전쟁 초기 제해권을 장악한 일본군은 병력 수송과 보급을 원활히 할 수 있었다. 이어 뤼순항과 배후의 203고지 공방전을 벌였는데, 이 전투는 1904년 8월부터 12월까지 지속되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른 끝에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이 승리로 일본은 지상 공격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05년 2월과 3월 사이 약 20일간 만주 봉천(현재 선양시)에서 치러진 전투는 러일전쟁 중 가장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결정적 전투였다. 총 60만 명가량이 참전한 이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이라 할 만큼 기관총과 대포, 참호전이 펼쳐졌다. 일본의 노기 마레스케가 이끄는 별동대의 활약이 빛났는데, 주력이 러시아군을 고착하는 동안 우회·포위함으로써 러시아군의 배후를 뒤흔들었다.
일본군이 승리하긴 했지만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러시아 9만여 명, 일본 7만여 명)가 생겨 더 이상의 작전 수행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러시아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정부와 황제를 규탄하는 대규모 시위와 폭동, 파업이 확산해 전쟁 수행에 한계가 있었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은 쓰시마해전
러일전쟁의 중요한 전투 중 하나로 쓰시마해전도 꼽힌다. 뤼순항에서 패한 러시아 극동함대를 증원하고자 북유럽에 위치한 발트해로부터 약 40여 척의 러시아 함대가 출항했다. 일본 함대가 위치한 쓰시마해협까지는 약 2만9000㎞로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8개월(1904년 10월 출항)의 항해 끝에 도착했다. 이 과정에서 선원들의 피로는 누적됐고, 함포 사격훈련이 부족해 전투력도 저하됐다. 더욱이 일본이 유인한 쓰시마해협은 물살이 거세고 파도가 높아 함포 사격의 정확도는 더 낮아졌다.
90여 척의 함대를 투입한 일본은 지형적 특징을 충분히 알고 있는 데다 훈련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전투력을 최정점으로 끌어올렸다.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러시아 함대가 쓰시마의 좁은 해협을 통과할 때 측면을 쳐 기함과 지휘선을 집중 공격함으로써 대형을 와해시키는 ‘T자 전술’을 펼쳤다. 일본은 T자 전술을 위해 쓰시마섬을 동서로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 러시아 패전과 혼란을 오페라에 담다
러시아 함대는 이런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거기에 피로 누적과 높은 파도, 사격훈련 부족, 미숙한 지휘, 불안정한 정치상황 등 어느 것 하나 유리하지 않았다. 결국 5월 27일 새벽 일본군의 포격 이후 5시간 만에 러시아 함대는 궤멸됐다. 쓰시마해전으로 러시아는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다. 반면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 대열에 합류하며 대륙 진출을 강화했다. 러시아에서는 무능한 황제와 정부를 향해 비판이 거셌졌고, 이는 1917년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19세기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 니콜라이 안드레예비치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 오페라 ‘금계’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대문호 푸시킨의 시 ‘황금 수탉 이야기’를 소재로 했다. 늙고 어리석은 도돈왕이 주변국의 침략에 시달리다가 어떤 점술가로부터 신비한 능력을 가진 황금 수탉을 선물받아 전쟁에 승리한다. 하지만 이 황금 수탉만 믿으면서 향락과 탐욕에 빠져 황금 수탉의 저주를 받아 죽음을 맞고, 왕국도 잃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러일전쟁에 패배한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분위기와 국민적 불만, 황제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비판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 러시아에선 오페라 연주가 금지됐었다.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