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책, 그때 그곳 >> 여수 거문도
동도·서도·고도로 구성 삼도로 불려
영 해군, 러 남하 차단 명분 2년 점거
성·포대·수로·전선·방파제 건설에
병원·창고·테니스장·당구장 갖추고
상하이까지 해저 전신케이블도 연결
청 중재로 철수…1951년 우리땅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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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는 여수에서 배편으로 3시간20분이 걸린다. 먼바다에 있어 파도와 바람이 강할 때 선박 피항처로 사용됐다. 유배지이기도 했다. 842호 1372명이 거주한다(2022년 기준). 동도·서도·고도 등 세 개의 섬으로 구성돼 오랫동안 삼도(三島)로 지칭됐다.
거문도라는 이름이 정조 때 암행어사 정만석의 ‘전남 도서지역 과징세’ 보고에 등장하지만(『정조실록』, 1795. 5. 22) 고종 22년 4월 16일의 『호남계록』에 “민호가 10호도 안 되는 거문도부터 삼도까지의 수참이 300여 리” “왜인들이 오인해 삼도를 거문도라 부른다”고 기재한 점으로 미뤄 거문도는 다른 작은 섬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도가 거문도로 바뀐 계기는 19세기 말 영국이 점거해 2년간 해군 주둔지로 삼았던 ‘거문도 사건’이었다. 영국은 이 섬을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이라고 부르며 성과 포대·수로·전선·방파제를 건설하고 800명의 병사에 군함 10척을 두었다. 막사·병원·창고·테니스장·당구장 등도 갖췄다. 거문초등학교 뒤에는 영국군이 만든 테니스장을 기념해 세운 ‘해밀턴 테니스장’이 마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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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군은 중국 상하이까지 해저 전신케이블도 연결했다. 부설선이 저속으로 항해하며 통신선을 풀어 넣는 방식으로 700여㎞ 거리를 작업한 데서 구보는 대영제국의 국력을 실감한다. 영국군은 전신으로 매일의 상황을 본국에 알렸다. 1886년 6월 18일 서도의 유곽으로 가던 배가 전복돼 수병 1명이 익사한 사고도 보고했다(『Anglo-Korean Relations and the Port Hamilton Affair』). 생필품은 일본 나가사키에서 보급선으로 조달했다. 당시 430여 호에 2000여 명이던 삼도 주민은 새 세상을 경험했다. 서양인의 모습과 함대·엔진·행진곡·맥주 등에 경탄했다. 세 섬 중 고도는 무인도였는데 영국군이 주둔하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1887년 영국군이 떠나자 일본인들이 들어와 전진 어업기지로 활용했다. 섬이 활기를 띠자 동도와 서도 주민들이 고도로 넘어와 큰 마을을 이뤘다. 지금의 거문리다.
1930년대에는 하루 수백 척이 출항하면서 북적였다. 주점과 일본인이 운영하던 유곽 등 유흥시설도 여럿 들어섰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구보는 첫 방문이던 1984년 거문리 포구 다다미 방에서 이곳에 풍부한 돌돔을 회로 먹으며 감탄한 기억이 있다.
고도는 전 지역이 역사공원이 됐다. 돌담길로 꾸며진 회양봉 산책로에서는 섬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온다. 구보는 이 평화로운 풍경이 한때 첨예한 긴장을 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공원의 중심인 영국군 묘지에는 수병들의 묘 3기가 남아 있다. 구보는 한 기가 1903년 사망자라는 사실에 의아해하다가 자료를 살핀 끝에 영국군이 철수 후에도 정박·보급·태풍 등의 이유로 간헐적으로 기항했음을 알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망자는 거문도 기항 중에 사망한 것으로 짐작됐다. 묘는 원래 9기가 있었으나 6기는 본국으로 송환됐다. 주한 영국 대사관이 매년 찾아와 참배를 한다. 구보는 비정상적 형태로 관계가 시작됐지만 역사는 명암을 가리지 않는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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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사건 배경에는 러시아의 팽창이 있었다. 러시아는 1858년 청과 영·불 연합군이 벌인 2차 아편전쟁을 중재한 대가로 청으로부터 100만㎢가 넘는 연해주를 할양받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동양 함대 기지를 만들었다. 1880년대 들어서는 한반도 진출에도 박차를 가했는데 조·러 밀착이 감지되자 영국은 저지에 나섰다. 1885년 4월 13일 일본 나가사키의 영국 함대 군함 3척과 보급선 등 7척이 거문도를 점거했다. 영국군은 거문도가 주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을 수용할 수 있고, 한·일 간 해상 통로였으며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차단할 수 있어 전략적 요충지로 봤다. 영국은 1845년에도 사마랑호를 보내 11일간 지형 조사와 주민 성향 파악을 한 뒤 제독 이름을 따 섬을 ‘해밀톤’이라고 명명했다(『明治天皇』).
러시아도 발트함대를 보내 독도 탐사에 이어 1854년 4월 9일부터 19일까지 삼도에 정박해 주민들과 접촉했다. 러시아 문호 이반 곤차로프가 동승기 『전함 팔라다』를 일기 형식으로 썼다. ‘거유문사’로 존경받던 주민 김류(1814~1884)도 당시 정황을 『해상기문』에 세세히 남겼다. 팔라다호 측이 중국인 통역사를 앞세워 개항을 설득하고 김류가 주민대표로서 거부한 한문 필담도 담았다.
거문도 점거 후 영국은 베이징 주재 대사 윌리엄 칼스 편에 조선에 통지문을 보냈다(『고종실록』). ‘본국으로부터 뜻밖의 일에 대응하기 위해 해밀톤이라는 섬을 얼마 동안 차지한다는 자문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뜻밖의 일’은 조선과 러시아가 ‘군대 육성과 영흥만 조차를 교환’하기로 한 밀약을 뜻했다. 전신이 없던 조선은 베이징의 통지를 5월 하순에서야 받은 데다 ‘해밀톤’이라는 섬이 어디인지를 몰라 파악에 시간이 걸렸다. 청 북양대신 리훙장이 고종에게 ‘제주도 동북쪽 100여 리 지점에 거문도가 있고, 이토 히로부미가 영국의 점거는 일본에 불리하다고 말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고 편지로 알렸다. 리훙장은 제독 딩루창에게 군함을 줘 거문도 정황을 살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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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연간 5000파운드씩 임대료를 내겠다는 협상안을 제시했으나 조선은 철수를 요구했다. 이 요청서에 대외관계를 맡던 독판 김윤식이 거문도를 삼도 대신 쓰기 시작했다. 1886년 가을 고종은 리훙장에게 ‘조·러 밀약설’을 해명하고 거중 조정을 요청해 수락받자 감사 편지에서 ‘곡진히 이해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며 조용히 진정시켜준 것’에 감읍했다(『운양집』). 영국군은 리훙장의 중재로 러시아로부터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고 1887년 2월 5일 철수했다.
거문도 사건은 당시 조선이 대외 사정에 무지했고, 국토 안전망이 허술했으며, 국제적 위상이 허약했음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고종은 거문도 사건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영국의 세계정책에 동참하기는커녕 계속 러시아에 의존하려 했다. 1896년 2월 단행한 ‘아관파천’이 그 증좌다. 민비를 잃은 을미사변 이후 왕실의 안전 보장을 우려한 결과였다. 집무실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이 돌발행동은 1905년 일본의 조선 외교권 강탈(을사늑약)을 영국이 묵인하는 빌미로 작용했다. 거문도는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과 일본 간 2차대전 강화회의에서 한국령으로 인정됐다. 슬픈 코미디였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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