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곁에, 예술>>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14 호렵도(胡獵圖)
문약을 경계하고…
사냥이라는 이름의 통합 군사훈련 통해
병사·황실가족·관료들의 유대감 공유
문무 조화 고심한…
예의 갖추면서 군사훈련 절차 익히는
이국 사냥장면에서 정조 소망이 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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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냥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매서운 바람을 타고 산세를 울린다. 원숭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깊은 산 속에 호화로운 의장을 갖춘 말 탄 무리와 가마가 서 있다. 머리 위로 거칠게 ‘꿩, 꿩’ 소리가 나서 나무를 올려보니 장끼가 앉아 있다. 궁수는 망설임 없이 활시위를 힘껏 당겨 목표물을 겨누고, 송골매와 매사냥꾼은 나갈 기회를 엿보고 있다. 말 위에 웅크린 사냥개 역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듯 언제든 달려 나갈 태세다. 곧이어 군사들의 힘찬 구령 소리와 함께 너른 평원에는 말발굽 소리가 진동하고 말을 재촉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이윽고 세 명의 기마병이 긴 창과 철퇴로 호랑이와 사슴을 몰아 이들을 에워싸고 길목을 막았다. 이 장면을 저 멀리서 지켜보며 망을 보는 병사들도 있다. 과연 돌아가는 길에 호랑이와 사슴을 포획물로 가져갈 수 있을까?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한 ‘호렵도’는 조선 후기 ‘이국적인’ 사냥 풍경을 담고 있다. 그림에 등장한 사람들이 조선 사람이 아니라 청나라 옷을 입은 사람들로 오랑캐를 뜻하는 ‘호(胡)’가 붙었다. 사냥을 뜻하는 한자어로 ‘대렵(大獵)’ ‘수렵(狩獵)’ ‘행렵(行獵)’ ‘출렵(出獵)’ 등을 썼는데, 오랑캐가 사냥하는 그림이라 ‘호렵도’라고 이름 지었다. 인물과 풍경이 조선 후기 김홍도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궁중 화원 양식이 보이는, 비단에 정교하게 그리고 채색한 작품이다.
이 병풍은 오랫동안 해외에 있다가 2020년 국외문화유산재단이 외국의 경매에서 매입해 환수문화유산으로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호렵도’라는 주제로 다양한 형식과 소재의 작품이 많이 있지만 작품의 구성과 필치, 채색 등을 보면 왕실용이거나 또는 사대부 이상의 상류층에서 감상했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냥을 그린 그림은 고구려 벽화에서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수렵도’부터 고려시대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까지 역사적으로 유래가 깊다. 원래 ‘대렵’은 왕이 나가는 큰 규모의 사냥을 뜻하는 말로 사냥을 계기로 무예를 연마하고 군대를 훈련하는 의미도 있다. 조선시대 초기 세조 임금은 직접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수렵을 즐겼고, ‘대렵도’로 신하들과 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은 이런 대렵을 빙자해 민가를 철거하고 사냥터로 만들었다. 또 매사냥을 위한 응방(鷹坊)에 엄청난 재정을 쏟아 원성을 들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왕과 대신들이 ‘대렵도’를 감상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숙종은 공민왕이 그렸다는 ‘천산대렵도(天山大獵圖)’를 보고 시를 지었고, 정조 역시 세자 시절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를 감상하고 시를 읊었다. ‘음산(陰山)’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흉노열전’에 나오는 한(漢) 나라와 흉노의 접경에 있던 산을 일컫는다. 성호 이익(1681~1763)과 이하곤(1677~1724)의 문집에도 같은 경우를 볼 수 있다. 정확히 이들이 본 작품이 공민왕이 그린 ‘대렵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당시 왕실과 사대부에서 ‘대렵’을 주제로 그린 그림을 감상하고 감흥을 기록했던 문화적 흐름을 알 수 있다.
당나라 시인 이백(701~762)이 지은 ‘대렵부(大獵賦)’에는 왕이 겨울에 호복을 입고 군사들과 사냥을 나가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 날쌘 군사들이 왕을 위해 수많은 들짐승과 날짐승을 사냥하는데, 문득 왕이 군사들이 모든 짐승을 사냥할까 두려워 사냥을 멈추라 말하고, 군사들에게 연회를 베푼다. 왕은 사냥을 통해 천하의 인재들이 조정을 보좌하면 세상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즐겁게 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다시 궁으로 돌아간다. 왕이 사냥을 통해 나라를 다스리는 이치를 깨닫는 모습은 당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올바른 왕의 사냥에 정치적 의미가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왜 청나라 사람들의 사냥을 그린 걸까? 18세기 중국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당시 청나라는 여진족에서 청나라로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6~1795)를 지나면서 가장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청나라 팔기군(八旗軍)의 체계는 기본적으로 사냥대와 같은 방식으로 구성됐다. 이들에게 사냥은 중요한 의식으로, 1683년부터 매년 가을 목란(木蘭·현 웨이창만족몽골족 자치현)에서 만주족과 몽골족의 사냥 전통을 종합한 사냥을 했다. 병사들을 비롯해 황실 가족과 관료들이 참여한 이 사냥은 군사훈련과 더불어 유대감을 공유했던 중요한 행사였다.
‘호렵도’에서 사냥터 주변 산에서 대기하고 있는 군인들이 보인다. 이는 산을 둘러싸는 ‘위렵’이라는 사냥 방식으로 여진족의 대표적 수렵 방식이자 군사훈련이다. 당시 이런 장면은 청나라의 궁정화가들이 많이 그렸고, 민간에서도 제작해 유통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사신들이 연행을 통해 북경을 오고 가는 기록에서도 ‘호렵도’를 봤다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조선에 청나라의 호렵도 그림이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일성록』을 보면 정조가 임금으로서 문약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문무(文武)의 조화를 실천하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예악을 숭상하면서도 여가에 활쏘기와 말타기를 폐지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면서도 틈틈이 수렵을 잊지 않으며, 아름다운 복장으로 용모를 다듬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예 익히는 일을 살피고, 차분하게 예의를 갖추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를 훈련하는 절차를 익히는 것, 이것은 옛 성왕(聖王)들이 구비해 행한 헤아릴 수 없는 신묘한 교화였다. 내가 비록 덕은 없지만 이것을 소원하고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일성록』 정조 7년,1783년 6월 26일 기사 중)
이런 정조의 관심은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1790)를 제작하고 편찬한 성과로 귀결됐고, 화성능행(1795)을 통해 군사훈련을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해 김홍도 역시 수렵도를 제작한 듯하다. 서유구(徐有?·1764~1845)가 쓴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김홍도가 그린 ‘음산대렵도(陰山大獵圖)’에 관한 글이 있다.
“우리 집에는 오래전부터 김홍도가 그린 ‘음산대렵도’가 있다. 견본으로 여덟 폭 연결병풍으로 돼 있다. 거칠고 누런 광야에서 활시위를 울리며 짐승을 쫓는 모습이 혁혁해 마치 살아있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김홍도는 스스로 말하기를 ‘내 평생의 득의작이니 다른 사람이 이것을 본떠서 그린 것이 있다면 밤의 어두움 속 물고기 눈이라도 한눈에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한 김홍도의 작품은 현재 전하지 않지만 아마도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작품과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어렵사리 우리 곁에 돌아온 이국의 사냥 장면에서 조선 후기 문무의 조화를 이루고자 했던 당시의 시대 과제를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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