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립운동가 오기호·이기·홍필주 선생
외교권 박탈 앞장선 을사오적 처단계획
국가보훈부(보훈부)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에 앞장선 을사오적 처단을 계획했던 오기호·이기·홍필주 선생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지난달 30일 밝혔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강제 체결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전국적 의병 봉기 등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이 격화됐다. 초기에는 일본 정부와 정계 인사에게 장서를 보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성토하고 대한제국의 주권 보전을 요구하는 등 외교적 대응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후 의열투쟁으로 전환됐다.
오기호(1865~1916) 선생은 을사늑약 강제 체결 이후 외교적 저항의 한계를 인식하고, 비밀결사조직 ‘자신회(自新會)’를 주도해 폭탄과 저격 등을 통한 을사오적 처단을 계획했다. 자금 조달과 무기 구입 등을 직접 관장했다. 이후에도 계몽운동, 실업교육, 대종교 참여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기(1848~1909) 선생은 을사늑약 저지를 위한 대일 외교 활동 이후 자신회에 참여했다. ‘자신회 취지서’를 작성해 을사오적 처단이 민족 해방을 위한 정치적 행위임을 분명히 밝혔고, 법정에서도 의거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이후에도 교육·계몽운동과 대종교 참여 등으로 독립운동의 기반 확립에 기여했다.
홍필주(1857~1917) 선생은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 등 일본 침략에 맞선 저항운동을 주도했다. 이후 이기 선생과 함께 도쿄에서 외교 활동을 하며 을사늑약 저지를 시도하고, 을사오적 처단계획에 참여했다. 대한자강회·대한협회 등을 조직해 계몽·교육운동에도 헌신했다.
을사오적 처단계획은 아쉽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구국운동의 방략이 외교에서 의열, 다시 정신운동으로 전환·확장되는 분기점이 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2월의 6·25전쟁 영웅 서홍선 육군소위·마리누스 덴 오우덴 네덜란드 육군중령
대한민국 자유와 평화 수호 위해 산화
같은 날 보훈부는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가 산화한 서홍선 육군소위와 마리누스 덴 오우덴 네덜란드 육군중령을 ‘2월의 6·25전쟁 영웅’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서홍선(1930~1952) 소위는 육군보병학교 갑종 6기로 입교해 군사훈련을 수료한 뒤 1951년 11월 24일 육군소위로 임관했다. 당시 전선은 휴전회담(1951년 7월~1953년 7월)이 병행되는 가운데서도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고지 쟁탈전이 본격화한 시기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과 38선 일대의 산악지형에서 치열한 공방을 이어 갔다. 특히 강원 양구·인제군 일대 고지대는 전선의 시야 확보와 화력 통제, 보급로 차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전략적 요충지로 작은 고지 하나가 전황의 균형을 바꿀 수 있는 핵심 지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임관한 서 소위는 곧바로 전선에 투입됐다.
1952년 2월 15일 새벽 양구 북방 662고지를 방어하던 3사단 수색중대 진지에 적의 집중 공격이 개시됐다. 서 소위는 소대원들을 지휘하며 적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저지하던 중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주저 없이 기관총을 인수해 진지를 사수했다. 적의 수류탄이 빗발치는 상황에서도 방아쇠를 놓지 않고 전투를 이어 간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우와 진지를 지키다가 장렬히 산화했다.
마리누스 덴 오우덴(1909~1951) 네덜란드 육군중령은 네덜란드 왕립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 대한민국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국제연대의 일원으로 유엔군 네덜란드대대에 자원했다. 같은 해 11월 미2사단에 배속돼 전선 후방으로 침투하는 적을 차단하는 방어 작전을 수행했다.
이듬해 2월에는 중부전선에서 전세를 반전시키기 위한 ‘라운드업 작전’에 참가해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을 선도했다. 하지만 강원 횡성교 일대에서 퇴각하는 국군을 엄호하던 중 전투를 지휘하다가 전사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유엔군이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노성수 기자/사진=국가보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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