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그리스에서 연극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했다. 현대에 와서 페르소나의 의미는 확장돼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은 외적 인격을 뜻하게 됐다. 페르소나는 원래 모습과는 다른 형태로 자신을 고의적으로 변형시켜 보여 주는 행위를 말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복잡하다. 역할과 상황이 주어지는 대로 거기에 맞는 페르소나가 요구된다.
장례식장에선 조문객으로서 페르소나가 있다. 복장은 엄격하고 슬픔을 담은 표정은 진지해야 한다. 웃음이 나오는 순간이 있더라도 참아야 한다. 조문객으로서 페르소나를 망각하면 무례한 사람이 된다. 야구장에 응원 갔을 때는 엄숙한 얼굴을 하면 안 된다. 신나는 모습이어야 한다. 신나는 모습을 하다 보면 정말로 신이 난다. 파티에 가서 어두운 표정으로 일관한다면 분위기를 망친다. 술을 못 마시거나 약하더라도 술 마시는 사람들과 동조하는 표정을 짓고 대화도 열심히 하면서 흐름을 맞춰야 한다. 페르소나를 위선 혹은 가식으로 정의해 버리면 곤란하다. 페르소나는 개인이 사회 활동을 할 때 필요불가결한 사회적 연출 능력이다.
백남준은 말년까지 순진무구한 사람이었다. 평소 그는 단추를 잠그지 않은 셔츠가 양복 소매 바깥으로 나올 정도로 헐렁한 차림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맞춰 ‘다다익선’이라는 대형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서울을 찾았을 때다. 제작비를 대준 삼성전자 관계자들과 만날 때는 의관을 잘 갖추려 노력했다. 넥타이도 매고 양복도 단정하게 입었다. 예술가이지만 주어진 책임을 잘 수행하는 비즈니스맨 같은 인상을 주기 위해서였다. 지원기업을 위해 그 정도 페르소나의 연출은 예의라고 봐야 한다. 말년의 백남준이 빌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바지와 팬티를 내린 사건은 유명하다. 백남준의 돌발행동에 클린턴은 어이없는 웃음을 지었다. 이 행위는 삼성전자에 보인 것과는 반대되는 방식의 페르소나 연기였다. 그 행위는 정치적 상징을 담은 퍼포먼스로 클린턴의 부적절한 과거를 은유했다. 그 일로 백남준은 악동의 페르소나를 갖게 되고 세계 유수의 언론에 실리며 자신의 이름을 크게 한 번 더 알렸다. 서른 살 무렵 백남준이 유럽에서 황색 테러리스트란 별명으로 활동했던 때를 상기시켰다. 그는 페르소나를 제대로 이해했고 적절하게 잘 활용한 예술가였다.
몇몇 예술가는 페르소나에 대한 집착이 지나치게 강해 보이기도 한다. 예술가들은 대중 앞에 진면목이 잘 노출되지 않는 신비한 존재다. 대중은 작품이나 퍼포먼스만으로 화가나 조각가를 상상한다. 그러나 작품 혹은 예술행위가 상상을 증폭시킨 예술가의 모습과 작품 뒤에 숨어 있는 실제 예술가의 본래 모습은 다를 때가 많다.
대중이 만든 허구의 세계가 강화되다 보면 작가는 어느덧 그 허구를 자신의 실체로 받아들인다. 일부 예술가가 나이 들수록 거짓말이 늘어나고 과거와 전혀 다른 면모의 사람이 돼 버리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연극의 역할을 위해 가면을 쓰는 게 아니라 연기자의 얼굴 자체가 변형돼 버린 경우다. 페르소나의 역기능이 작용한 결과다.
그림이나 조각작업은 페르소나에서 벗어난 나약한 작가가 신 앞에 홀로 마주 서서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일과 같다. 백남준의 경우처럼 페르소나는 필요에 따라 탈부착이 가능해야 한다. 역기능의 페르소나가 자신의 실체인 양 굳어 버린 지경까지 이르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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