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선 따라 호흡하고, 풍경 따라 녹아들고... 자연을 짓다 예술이 되다

입력 2026. 01. 29   15:57
업데이트 2026. 01. 29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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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곁에, 예술>> 미술관의문법 ① 호암미술관: 겹쳐진시간의층위,상호관입의미학

이병철 삼성 창업주 수집품으로 개관
사립미술관 효시이자 문화유산 보고
전통 정원 ‘희원’ 작품과의 조화 압권
현대미술과 자연의 공존, 모범 답안지

한국 전통 정원, 호암미술관 희원. 필자 제공
한국 전통 정원, 호암미술관 희원. 필자 제공


미술관은 시간이 멈춘 장소가 아니라 시대 변화에 따라 새롭게 호흡하는 공간이다. 전시가 바뀌고 해석이 갱신되며, 때로는 건축 자체가 새로운 언어를 획득하기도 한다. ‘미술관의 문법’은 미술관을 살아 있는 현재진행형의 장소로 바라보며 그 탄생과 변주, 그리고 미술관의 동시대적 대화에 귀 기울여 보고자 한다. 이 연재의 첫 번째 공간으로 호암미술관을 선택한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호암미술관은 한국 미술관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간과 동시대적 변화가 교차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호암미술관은 건물의 입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어떤 미술관은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부터 이미 감각이 확장되는데, 용인 호암미술관으로 가는 길이 그렇다. 서울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하다 보면 미술관에 도착하기 전 어린 시절 우리를 설레게 했던 장소인 에버랜드를 지나게 된다. 유원지의 기억과 미술관으로 향하는 현재의 시간이 겹쳐지며 공간에 대한 감각은 자연스럽게 울렁이기 시작한다. 에버랜드를 지나 조금 더 들어가면 풍경은 급격히 조용해지며 숲과 언덕이 시야를 채운다. 호암미술관은 관람객을 단번에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게 하지 않는 대신 속도를 늦추는 시간을 요청한다. 주차장에서 미술관 건물로 향하는 산책길과 정원으로 이어지는 진입 동선은 마치 전시의 프롤로그처럼 작동한다.

2023년의 재탄생, 고전과 현대의 ‘상호관입’

이러한 접근 방식은 호암미술관의 정체성과 깊이 맞닿아 있다. 1982년 개관한 이 미술관은 삼성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이 30여 년에 걸쳐 수집한 한국 미술품을 바탕으로 개관한 한국 사립미술관의 효시이자 우리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그의 컬렉션은 개인적 취향을 넘어 한국 미술사와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형성됐다. 회화와 서예, 도자와 불교미술에 이르기까지 이어진 수집의 궤적은 ‘무엇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란 고민과 그 방향성을 담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전시의 스펙트럼이다. 고미술 중심의 공간이던 호암미술관은 재개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 김환기의 대규모 회고전 ‘한 점 하늘_김환기’(2023)를 개최하며 동시대 미술관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어 2025년에는 20세기 현대미술의 거장 루이즈 부르주아의 대규모 개인전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을 통해 세계적인 작가의 예술 세계를 고즈넉한 전통 정원과 함께 선보였다. 이는 설립자가 강조했던 ‘우리 문화의 계승’이 단순히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 예술과의 대화를 통해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년 조선 후기의 화가 정선을 조명한 전시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다시 읽을 만하다. 정선은 과거의 거장이 아니라 자신의 시대를 동시대적으로 사유한 화가였다. 호암미술관은 그의 진경산수를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불러내며, 전통을 현재형으로 읽는 방법을 제안했다.

자연으로 확장된 전시장, 희원(熙園)

한국 전통 정원 희원은 호암미술관을 완성하는 핵심 요소다. 담장 너머 풍경을 정원 안으로 끌어들이는 차경(借景) 원리를 이용해 계절마다 각기 다른 폭의 풍경화를 그려낸다. 특히 봄철의 호암미술관은 그 풍경이 절정에 달한다. 미술관 진입로의 벚꽃 터널부터 희원 내에 번지는 매화 향기, 그리고 보화문(寶華門)을 지나 마주하는 소나무와 석조물의 조화는 시각적 유희를 넘어선 치유의 시간을 제공한다. 연못과 석교, 정자와 굴곡진 산책로는 계절마다 전혀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늦봄과 초가을, 신록과 단풍이 희원의 풍경을 완성하는 시기, 전시실과 정원, 건축과 산책길로 이어지는 시각적 완성도가 절정에 이른다. 용인으로 향하는 길에서 시작된 설렘은 전시를 넘어 정원에 이르러 비로소 완성된다.

희원 곳곳에는 동시대 미술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장미셸 오토니엘의 조각은 빛과 물, 식생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다른 표정을 드러낸다. 작품은 자연을 배경으로 두지 않고 자연의 일부처럼 작동한다. 전통 정원과 현대미술이 충돌하지 않고 공존하는 이 풍경은 호암미술관이 전통과 현대를 대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새롭게 개관한 이우환 작가의 동관은 이러한 공간적 실험을 더욱 분명히 한다. 이우환은 관계와 여백, 존재의 위치를 사유해 왔다. 동관은 그의 작품 세계를 하나의 독립된 장소로 구현하며, 관람객에게 빠른 해석 대신 잠시 멈춤의 시간을 요구한다. 이곳에서 작품 감상은 시각적 경험을 넘어 공간과 함께 호흡하는 사건이 된다.

2026년 호암미술관이 예고한 행보 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한국 여성 조각 1세대를 대표하는 거장, 김윤신의 대규모 회고전이다. 이번 전시는 70여 년에 걸쳐 ‘기원(Praying)’과 ‘합일(Unity)’이라는 화두 아래 나무와 돌의 원초적 생명력을 탐구해 온 작가의 예술 세계를 입체적으로 조망한다. 특히 아르헨티나의 자연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재료의 물성을 뚫고 나오는 강인한 조형미는 희원의 한국적 풍경과 만나 시공간을 초월한 미학적 조응을 이룰 것으로 기대된다. 벚꽃이 만개하는 봄, 혹은 단풍이 물드는 가을, 계절의 변화와 함께 호흡하는 호암미술관을 찾아보길 권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방식을, 그리고 미술관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살아 있는 공간임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필자 심지언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시각사업본부장,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 전시팀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각예술 전문 매체 월간미술의 편집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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