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구 소도시, 묵호
“라면 먹고 갈래요?” 그 아파트…동해까지 쭉 이어지는 도로…
레트로 감성 가득 골목·전통시장엔 오밀조밀 예쁜 굿즈숍들
옹기종기 모인 명소 둘러보고 문어짬뽕 한 그릇 충분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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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차가 있어야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걸어 다녀야 제맛인 동네가 있다. 강원 동해시 묵호가 그렇다.서울에서 KTX를 타고 2시간 반이면 도착하는 이 작은 항구 마을은 볼거리가 전부 도보로 30분 안에 모여 있다. 운전대를 잡고 이동하는 시간에 골목 구경 한 바퀴 더 할 수 있다는 얘기다. 강릉이나 속초에 비하면 이름값은 덜하다. 그게 오히려 장점이다. 사람에게 치이지 않고 바다를 보고, 골목을 걷고, 로컬숍 앞을 기웃거리는 여유로운 하루가 가능하다. 최근 SNS에서 묵호 사진이 부쩍 눈에 띄는 건 우연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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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묵호가 뜨는 이유
일본 가마쿠라에 가 본 적이 있는가. ‘슬램덩크’ 팬들 사이에서 ‘그 건널목’으로 유명한 곳이다. 바다 앞으로 전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찍으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린다. 묵호에도 비슷한 풍경이 있다. 동해를 배경으로 도로가 뻗어 있는 구간. 일본까지 안 가도 그 감성사진을 건질 수 있다.
2001년 영화 ‘봄날은 간다’를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영애가 유지태에게 “라면 먹고 갈래요?”라고 했던 그 장면. 촬영지가 묵호에 있다. 논골담길에서 조금 떨어진 삼본아파트라는 곳인데, 20년 넘게 그 모습 그대로다. 낡은 6층짜리 건물이 요즘은 레트로 감성을 찾는 사람들에게 또 하나의 명소가 됐다. 다만 실제로 주민들이 사는 곳이니 조용히 구경하는 센스는 필수다.
동해시도 분위기를 읽었다. 묵호항 초성을 따서 만든 ‘ㅁㅎㅎ’ 조형물부터 논골담길 벽화 새 단장까지. 인증샷 욕구를 자극하는 포토존이 하나둘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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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게들이 만드는 묵호 감성
묵호역에서 내리면 프랜차이즈 간판보다 작은 로컬숍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나나스테이션’은 향기 편집숍 겸 카페다. 바다 냄새, 소나무, 항구의 기억 같은 이름이 붙은 디퓨저와 향수를 판다. 묵호 분위기를 병에 담아 가는 기분이랄까. ‘여행책방 잔잔하게’는 여행책 위주로 큐레이션 하는 독립서점이다. 공간은 작지만 주인장이 직접 고른 책들 사이로 묵호 관련 소품이 섞여 있다. 여행 동선이나 숨은 스폿 정보를 얻기에도 좋다.
다이어리 꾸미기를 좋아하는 이른바 ‘다꾸러’라면 ‘끼룩상점’에 들러 보자. 동쪽바다중앙시장 안 뉴월드상가에 있는 한 평짜리 굿즈숍이다. 동해 바다를 담은 엽서, 마스킹테이프, 묵호 모티브 배지와 스티커가 빼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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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만 모은 박물관과 번화가의 흔적
‘연필뮤지엄’은 이름 그대로 연필만 다루는 박물관이다. 세계 여기저기서 모은 연필 수천 점이 전시돼 있다. 연필이 뭐 볼 게 있나 싶겠지만, 막상 가 보면 생각보다 더 빠져든다. 유명 작가들이 쓰던 연필, 특이한 디자인의 빈티지 연필 같은 것들. 4층 카페에서 내려다보는 묵호 전경도 꽤 괜찮다.
연필뮤지엄에서 조금 걸으면 발한삼거리가 나온다. 지금은 조용한 동네이지만, 탄광이 돌아가던 시절엔 묵호에서 가장 잘나가는 번화가였다. 술집, 백화점, 극장이 줄지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때 풍경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오래된 간판과 건물 외벽에 시간의 결이 남아 있다. 옛 검역소 건물을 고쳐 만든 ‘갤러리 바란’도 이 근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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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골목, 청년들이 끼어들다
동쪽바다중앙시장은 묵호항이 생길 때부터 함께한 재래시장이다. 관광객용으로 꾸민 시장이 아니라 동네 주민들이 실제로 장을 보는 곳. 생선 파는 좌판, 반찬가게, 떡집 사이로 어슬렁거리다 보면 여행 온 건지, 심부름하러 온 건지 헷갈린다. 그 느낌이 좋다.
시장 옆 길가의 오래된 건물을 재구성해 만든 청년몰 ‘싱싱스’는 분위기가 확 다르다. 젊은 창업가들이 모여 만든 공간으로, 여행자가 몰리며 활기를 띠고 있다. ‘111호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LP를 틀어 둔 채 사진 기반 제품이랑 로컬 굿즈를 판다. 재래시장 특유의 북적임과 청년들의 감각이 묘하게 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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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골담길, 계단 위 마을
묵호 하면 논골담길이다. 항구 뒤쪽 언덕배기에 다닥다닥 붙은 집들 사이로 좁은 골목이 이어진다. 옛날엔 비가 오면 질퍽해져 ‘논골’로 불렀다는데, 지금은 계단과 벽화로 단장된 마을이 됐다. 어민들의 일상을 담은 그림, 오래된 사진, 짧은 문구가 골목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숨이 좀 차더라도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자. 묵호등대가 기다리고 있다. 오랜 세월 이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에 길을 알려 준 등대다. 여기서 내려다보는 묵호항과 푸른 바다가 계단을 오른 보람을 채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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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째비골에서 바다 위를 걷다
논골담길 바로 옆에 ‘도째비골 스카이밸리’가 있다. ‘도째비’는 강원도 사투리로 도깨비란 뜻. 예전에 이 근처에서 도깨비불이 종종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2021년에 문을 연 이곳의 핵심은 해발 59m 높이 유리바닥 스카이워크다. 발밑으로 바다가 보이는 게 은근히 아찔하다.
스카이워크 말고도 공중자전거 ‘스카이 사이클’, 원통형 미끄럼틀 ‘자이언트 슬라이드’ 같은 놀거리가 있다. 길 건너편 ‘해랑전망대’는 무료다. 도깨비방망이 모양 다리 위를 걸으면 진짜 바다에 떠 있는 기분이 든다.
바닷바람에 마르는 황태, 덕장마을
묵호등대 근처에 덕장마을이 있다. 황태 말리는 동네다. 황태덕장 하면 대관령이 유명하지만, 묵호에서도 오래전부터 황태를 말려 왔다. 나무선반에 황태가 주렁주렁 걸린 풍경이 독특하다. ‘문화팩토리 덕장’은 이 마을에 들어선 복합문화공간. 카페에서 바다를 감상하며 잠시 쉬어 가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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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뭘 먹을까
묵호에서 문어를 안 먹으면 좀 아쉽다. ‘거동탕수육’은 문어탕수육과 문어짬뽕으로 이름난 중국집이다. “탕수육에 문어가 들어간다고?” 튀김옷 씹히는 맛과 문어 특유의 쫀득함이 의외로 잘 맞는다. 짬뽕도 문어가 푸짐하게 들어가 국물이 시원하다.
강원 영동지역 향토음식인 장칼국수도 빼놓을 수 없다. ‘오뚜기칼국수’는 할머니 세 분이 운영하는 오래된 집인데, TV에 나온 뒤로 더 알려졌다. 일반 칼국수랑 다르게 고추장 베이스 국물이라 걸쭉하고 얼큰하다. 많이 걸어서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딱이다.
걸어야 보이는 것들
묵호는 걸어야 제맛이다. 차 타고 휙 지나가면 그냥 작은 항구 마을이다. 하지만 골목골목 들어가 보면 이야기가 있다. 탄광 시절의 흔적, 덕장에서 불어오는 바람, 언덕 마을 계단에서 마주치는 고양이와 어르신들. 속도를 늦춰야 보이는 풍경들이다. 붐비는 관광지에서 사람들 사이로 인증샷을 찍는 것보다 한적한 골목에서 나만의 장면을 발견하는 게 더 끌린다면 묵호가 맞다. 차가 없어도 되고, 시간을 많이 안 들여도 된다. 서울역에서 KTX를 타면 2시간 반 뒤에 동해다.
묵호만으로 아쉽다면
하루 더 머문다면 동해시 곳곳을 둘러보자. 어달해변은 물고기 모양 빨간 등대가 인상적인 해변으로, 일출 명소로 꼽힌다. 붉은 등대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장면은 새해 아침 단골 풍경이다. 망상오토캠핑리조트는 백사장 바로 앞에서 캠핑이 가능한 곳.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비큐 굽는 낭만을 즐길 수 있다. 동해시에서 산간지역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무릉별유천지가 나온다. 과거 시멘트공장과 석회석 채광지가 있던 지역이다. 현재는 폐광돼 이색적인 테마공원으로 거듭난 곳이다. 물이 고여 만들어진 에메랄드빛 호수가 인상적이다. 알파인코스터, 오프로드 루지, 스카이글라이더와 같은 액티비티도 있어 자연 속에서 한바탕 놀기에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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