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는 천사가 없다... 내일이 없는 광란의 질주

입력 2026. 01. 27   16:46
업데이트 2026. 01. 2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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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

대공황기 ‘낙오자’가 된 두 사람
고통서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
결국 범죄자 미화라는 시선 있지만
길 잃은 자들의 비극적 탈출기일 뿐

사진=쇼노트
사진=쇼노트


보니와 클라이드가 간절히 꿈꾼 것은 낙원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에덴’으로부터의 탈출이었을지 모른다.

뮤지컬 ‘보니 앤 클라이드’가 11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오는 3월 2일까지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에서 공연되는 이번 시즌은 익숙한 이야기를 다른 각도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또렷하다. 실존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이유로 이 작품은 늘 ‘그래 봐야 결국 범죄자 미화’라는 일부 시선을 피하지 못해 온 게 사실이다. 김태형 연출은 이 오래된 논쟁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보다 질문의 방향을 살짝 틀어 놓는다. 무엇을 저질렀는지가 아니라 이들이 어떤 세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두드러지게 보여 준다. 총이 등장하기 전부터 이들의 삶은 이미 숨이 막힌다.

배경은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다. 은행은 파산했고, 일자리는 사라졌으며, 성실함은 더 이상 보상이 되지 않는다. 웨이트리스로 살아가는 보니 파커와 가난과 차별을 겪으며 사회에서 밀려난 클라이드 배로우에게 이 세계는 결코 에덴과 같은 낙원이 아니다. 벗어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고, 머무르자니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곳. 보니의 말처럼 두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기 전부터 이미 충분히 벌을 받고 있었다.

반복되는 일상에 염증을 느끼던 보니는 우연히 자신의 차를 훔치려던 클라이드를 만나고, 둘은 서로에게서 닮은 결핍을 알아본다.

클라이드는 형 벅과 함께 좀도둑질을 하다가 다시 감옥에 갇히고, 보니는 그의 부탁으로 총을 들고 감옥을 찾는다. 두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는다. 탈옥 이후 은행털이와 도주가 이어지고, 먹고살기 힘들던 사람들은 이 무법자 커플에게 환호를 보낸다. 신문 1면을 장식하는 날, 보니와 클라이드는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남겼음에 기뻐한다.

사소해 보이지만 납덩이처럼 묵직한 소품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초록색 사과다. 처음 이 사과를 클라이드에게 건네는 인물은 보니의 엄마다. 엄마는 끝까지 딸을 기다리고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사과는 유혹이 아니라 위안에 가깝다. 살아 있으라는 신호, 돌아올 자리가 있다는 표시다.

그러나 보니가 사과를 한입 베어 물고 클라이드에게 던져 주는 순간, 그 의미는 달라진다. 이 지점은 성경 창세기 속 하와가 선악과를 아담에게 건네는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보니의 사과는 선택의 상징이다. 누가 사과를 먼저 집어 들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두 사람 모두 이 현실의 에덴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데 동의하고 있어서다.

선악과는 곧 총으로 모습을 바꾼다. 총은 선이자 악이면서 선도 악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총은 힘이다. 말하지 않아도 되고, 설득하지 않아도 되는 힘. ‘Raise a Little Hell(작은 지옥을 일으켜)’에서 클라이드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장면은 통쾌하면서도 위태롭다. ‘This World Will Remember Us(이 세상은 우리를 기억할 거야)’ ‘Too Late to Turn Back Now(이제 돌아가기엔 너무 늦었어)’가 이어지며 한 번 건넌 강을 다시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을 차갑게 확인시킨다. 두 사람은 이미 에덴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사진=쇼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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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살인 이후 숙소에서 벌어지는 다툼을 계기로 이야기는 기어를 바짝 올린다. 흥분과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클라이드는 보니가 사 온 사과가 썩었다고 화를 낸다. 분노는 보니를 향해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을 겨누고 있다. 에덴의 밖은 자유로웠지만, 그 자유는 독이 든 사과처럼 위험했다. 두 사람은 결국 에덴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그 귀환의 끝은 넘버에도, 대사에도 언급되지 않지만 보니도, 클라이드도, 관객도 모두 알고 있다. 마치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70)의 마지막 장면처럼 두 사람은 무자비한 총알 세례와 함께 암전 속으로 사라진다.

이봄소리의 보니는 기존의 보니로 인해 흔히 떠올리는 ‘섹시한 범죄자’ 이미지에서 살짝 비켜서 있다. 영민해 보이고 판단이 빠르며, 감정에 휘둘리기보다 상황을 정확히 읽는 보니다. ‘Dyin’ Ain’t So Bad(죽는 것도 나쁘진 않아)’에서 보여 준 감정의 폭은 놀라웠다. 그는 클라이드가 하려는 일을 정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고, 그 결과를 감당하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다.

조형균은 어쩐 일인지 자주 만나는 배우다. 캐스팅을 사전에 확인하지 못하고 공연장을 찾았는데 ‘오늘의 주인공은 조형균’인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가 연기하는 캐릭터에는 확실히 조형균이 묻어 있다는 느낌이 있는데, 클라이드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 거칠지만 사악하지 않다. 미래를 노래할 때는 소년의 눈을 하고 있다. ‘When I Drive(내가 운전할 때)’는 좋은 넘버였다.

김찬호의 벅도 재밌다. 늙지 않는 뱀파이어 역을 많이 맡아 한때 ‘탈인간계’로 불렸던 이 배우는 어쩐 일인지 점점 더 귀여워지고 있다. 벅은 자칫 멍청하고 대책 없이 일만 저지르는 남자로 그려질 수 있는 인물이지만, 김찬호는 단호한 결단력과 동생을 향한 사랑을 자연스럽게 녹여 넣었다.

벅의 아내이자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정상인’으로 보이는 블랜치 역의 배수정은 노래와 연기 모두 믿고 선택하는 배우다. 캐스팅 보드에서 그의 이름을 발견하면 꽤 반갑다. 배수정의 블랜치는 “회개하세요”를 입에 달고 사는 교회 권사님의 모습이 아니다. 완고하지만 용기가 있으며, 남편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직접 행동에 나선다. 보니와 블랜치의 기싸움 장면은 한국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이번 시즌의 ‘보니 앤 클라이드’는 범죄를 미화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미 벼랑 끝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다른 길이 정말 없었는지를 묻는다. 이 이야기가 범죄담이 아니라 실패한 탈출에 관한 비극으로 들리는 이유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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