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 핀란드 독립운동과 ‘핀란디아’
스웨덴과 러시아 사이 벌어진 전쟁
1808년 8만 대군 이끈 러 침공에 대패
평화조약으로 핀란드, 러시아 지배로
국민들의 저항의지 교향곡에 녹여
독립 쟁취한 환희의 분위기, 고스란히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촉발된 저항활동은 북유럽의 핀란드에서도 있었다.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이자 국민음악의 대가 잔 시벨리우스(1865~1957)는 1899년 러시아 지배에 대한 국민저항의 상징을 표현하는 ‘핀란디아(Finlandia), Op. 26’이라는 교향시를 작곡했다. 당시 핀란드에선 러시아의 억압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애국심이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연극감독이었던 카를로 베르그봄은 6막의 핀란드 역사를 소재로 하는 연극을 계획하고 배경음악을 시벨리우스에게 의뢰하면서 이 곡이 탄생했다.
시벨리우스, 독립을 염원하는 교향시 작곡
이 연극의 마지막 6막 ‘핀란드여 깨어나라’ 부분에서 배경음악만 따와 개정해 발표한 곡이 교향시 ‘핀란디아’다. 전체 3악장의 곡이지만 8분 남짓한 단악장으로 연주되며 그 안에선 3개 파트로 주제 흐름이 바뀌는 게 역력하다. 기악곡으로 작곡됐지만 핀란드에서는 ‘핀란디아 찬가’ 노랫말을 붙여 합창곡으로도 자주 연주된다.
가사 중 일부를 보면 이 곡이 얼마나 국민의 애국심을 자극하는지 알 수 있다. “아 일어나라 핀란드여 /높이 들어 올려라 /너의 과거는 자랑스럽게 등극했다 /아 일어나라 핀란드여 /노예의 흔적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보여 줘라 /억압에 굴복하지 않았으니 자랑스러운 아침이 시작되리라, 조국이여.”
이 밖에도 시벨리우스의 음악에는 당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된 애국적 소재의 작품이 많다. ‘쿨레르보 교향시, Op. 7’도 그중 하나다. 이러한 소재의 출발점은 나폴레옹 전쟁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웨덴과 러시아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신세가 된 핀란드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내린 대륙봉쇄령에 스웨덴이 참여하지 않자 러시아와 사전조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1808년 스웨덴을 침공했다. 12세기(또는 13세기)부터 스웨덴에 속해 있던 핀란드는 스웨덴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자동으로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됐다.
러시아·스웨덴 전쟁은 흔히 ‘핀란드 전쟁’으로 불린다. 언급한 것처럼 대부분의 전투가 당시 스웨덴의 일부였던 핀란드 지역에서 이뤄져서다. 전쟁 전 주러시아 스웨덴대사가 러시아가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내용을 스톡홀름에 계속 전달했지만, 스웨덴은 이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스웨덴은 전쟁 대비가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다. 반면 러시아는 핀란드와 인접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병력을 점차 집결하며 전쟁을 준비했다.
러시아, 마침내 핀란드를 공격
마침내 러시아는 1808년 2월 선전포고 없이 약 8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핀란드를 침공했다. 3월에는 덴마크도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스웨덴은 양쪽 모두를 대비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핀란드에는 스웨덴 소속의 핀란드군과 스웨덴군 6만 명 정도가 있었다. 러시아가 계속 병력을 증원한 데 비해 스웨덴의 지원은 원활하지 못했다. 러시아는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는 한편 내륙으로 공격하는 2개의 축선을 활용했다. 그런데 스웨덴군 사령관은 핀란드 남부 스바르톨름 요새와 스베아보리 요새만 남기고 북쪽으로 후퇴했다. 러시아는 추격과 동시에 서부 해안을 따라 진격했다.
4월에는 견고하다고 믿었던 스베아보리 요새가 함락됐다. 이는 스웨덴에 심리적으로 큰 충격을 줬고, 군의 기세는 꺾였다. 일부 지역에선 스웨덴군이 승리하기도 했지만 러시아의 계속되는 증원을 넘어설 순 없었다. 해안선을 따라 진격하던 러시아군은 9월 오라바이스에서 스웨덴군과 결전을 벌였다. 스웨덴군은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내륙에서도 마지막 결전을 치렀지만 러시아군에 대패했다. 결국 스웨덴은 1808년 10월 27일 로크테아에서 휴전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억압…핀란드 저항활동 본격화
휴전 후 평화조약을 체결해야 하는데, 1809년 3월 스웨덴에서는 나폴레옹에 맞서 강경책을 쓰다가 전쟁에서 패한 구스타브 4세(1778~1837)를 폐위시키려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결국 국왕은 폐위됐고, 새 국왕 체제에서 1809년 9월 9일 러시아와 프레드릭스함 조약을 맺으면서 핀란드를 러시아에 할양했다.
당시 러시아 알렉산드르 1세(1777~1825)는 핀란드에 지나칠 정도로 유화책을 썼다. 강경책을 쓰게 되면 핀란드가 스웨덴으로 다시 돌아설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핀란드에 자치권을 부여하고 스웨덴식의 행정과 사법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게 했다. 공용어로 스웨덴어를 사용하는 것도 허용했다. 종교도 러시아 정교가 아닌 루터교회를 인정했고 헬싱키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헬싱키 대성당을 새로 지어 줌으로써 국민의 불만을 크게 완화했다.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러시아 총독이 핀란드를 통치하면서 이러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총독은 러시아 동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불만을 고조시켰다. 특히 새 황제 니콜라이 2세(1868~1918)는 핀란드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스웨덴어 사용도 통제해 문화예술인의 반감을 샀다. 그러던 중 1848년 프랑스 등에서 빈 체제에 저항하는 혁명이 일어나자 핀란드에서도 민족주의 움직임이 싹텄다.
독립을 향한 절실함, 교향시에 담아
핀란드 학자 엘리아스 뢴로트(1802~1884)는 오래전부터 구전되던 내용을 정리한 영웅 서사시 『칼레발라(Kalevala)』를 저술했다. 이 작품은 당시 대부분의 핀란드인이 갖고 있던 잠재된 민족의식을 일깨웠고 독립을 향한 저항의지에 불을 붙이는 촉매제가 됐다. 문화예술인은 저항활동의 하나로 연극 공연을 계획했다. 시벨리우스는 연극의 배경음악을 의뢰받았고 마지막 연극의 배경음악으로 사용된 게 ‘핀란디아’다.
시작 부분은 장중하면서도 절박한 당시 상황이 반영돼 나타난다. 묵직하고 가슴에 무엇인가 끓어오르게 만드는 것이 느껴진다. 러시아에 탄압받는 핀란드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된 느낌이다. 이후 중간 부분에선 점차 템포가 빨라지며 민중의 강력한 저항활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난 듯한 모습이 묘사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결국 러시아의 탄압을 물리치고 핀란드가 독립을 쟁취한 듯한 감격과 환희의 분위기가 드러난다. 핀란드는 1917년 마침내 러시아로부터 독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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