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프랑스 카미유 생상스 '보불전쟁 분위기를 행진곡으로 '
보불(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프로이센의 덫에 프랑스가 걸려든 것이었다. 독일 통일을 앞둔 프로이센으로선 독일연방의 남부 지역이 아직도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게 큰 장애물이라고 판단했다. 독일이 통일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앞으로도 계속 견제할 세력은 프랑스라고 봤기에 일전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전쟁을 먼저 일으켰다는 비난을 원하지 않았다. 전쟁의 빌미를 프랑스가 만든 것으로 상황과 여건을 조성하던 중 ‘엠스 전보사건’이 터졌고, 급기야 프랑스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의 전략대로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 직접 전장 지휘
프랑스군은 1870년 8월 2일 약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독일 자르브뤼켄 방향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그러나 프로이센군이 이미 약 38만 명의 병력으로 대비하고 있어 프랑스군은 크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 패배한 프랑스군은 후방에 위치한 메스요새로 후퇴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프랑스는 몇 차례 공격을 시도했으나 번번이 프로이센에 패했다.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약 12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메스로 향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던 프로이센군이 메스로 가는 길목을 차단해 진출이 좌절됐다.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스당요새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스당요새 후퇴를 예상했던 프로이센 참모총장 헬무트 폰 몰트케가 이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몰트케는 직접 약 2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스당요새를 완전히 포위했고, 포병 화력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프랑스군도 몇 차례 포위선을 돌파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시간이 점점 지나자 스당요새에는 식량과 물자, 탄약이 바닥나 더는 버틸 수 없게 됐다.
결국 9월 2일 전쟁이 개시된 지 한 달 남짓한 상황에서 나폴레옹 3세는 항복했다. 그와 함께 약 8만3000여 명의 병력도 포로가 됐다. 이후 독일제국은 스당전투가 있었던 9월 2일을 ‘스당의 날’로 이름 붙이고 독일 통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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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당전투 패배로 나폴레옹 3세 항복
프로이센은 보불전쟁이 이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폴레옹 3세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한 파리시민은 크게 분개했다. 시민들은 나폴레옹 3세의 제정을 붕괴시키고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공화정의 ‘국민방위정부’를 세워 계속 독일에 항쟁할 것을 결의했다. 시민들과 스당전투에서 이탈한 병력, 일부 해군 병력까지 합세해 저항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프로이센군은 파리로 진격, 9월 15일 파리 외곽에 도착했고 같은 달 19일에는 파리를 완전히 포위했다. 프랑스군은 약 4개월간 포위된 상태에서 저항했다. 파리 외곽에서도 일부 항전이 있었지만 끝내 프로이센의 압도적 병력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1월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1월 18일에는 베르사유궁전 거울의 방에서 프로이센은 북독일연방을 해체하고 독일제국을 선포하며 빌헬름 1세가 초대황제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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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한복판 독일군의 사열식…프랑스 국민 자존심 자극
3월 1일에는 파리에서 독일군의 개선식이 열렸다. 말 그대로 독일군의 사열과 시가행진을 파리 한복판에서 한 것이다. 프랑스로선 정말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아울러 양측은 프랑크푸르트조약을 맺어 프랑스는 약 50억 프랑의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고, 알자스로렌 지역을 독일에 빼앗겼다.
당시 프로이센은 프랑스가 50억 프랑을 배상하려면 기간이 오래 걸릴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프랑스가 배상금을 다 갚을 때까지 프로이센 군대가 파리에 주둔한다는 내용을 조약에 포함시켰다. 프랑스 국민은 하루라도 빨리 프로이센 군대를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국민 모두가 기금을 내 2년 만에 배상을 완료했다. 독일제국 군대는 배상이 너무 빨리 이뤄진 것에 당황스러워하며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프랑스 작곡가 카미유 생상스가 작곡한 ‘영웅행진곡, Op. 34’는 우리가 알고 있는 밝고 경쾌한 분위기의 행진곡과는 다른 느낌이다. 프랑스가 보불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비장하고 무거운 느낌을 주며 느린 템포로 연주된다. 7분 정도의 연주 동안 후반부는 어느 정도 빠른 템포로 유지되면서 마무리하는 느낌이지만 행진곡이라기보다 교향시에 가까운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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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상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음악에 담아
생상스는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프랑스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인물이다. 우리에게는 ‘피아노 협주곡 2번’ ‘첼로 협주곡 1번’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소’와 모음곡 ‘동물의 사육제’, 교향시 ‘죽음의 무도’, 오페라 ‘삼손과 데릴라’ 등 수많은 곡이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태어난 생상스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란 소리를 들었다. 특히 오르간과 피아노에 천부적 소질이 있어 호평을 받았다.
보불전쟁이 한창이던 때 생상스는 국민방위군 호위병으로 근무하며 파리 방어에 나섰다. 당시 전쟁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국왕인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고 전쟁에 패해 파리가 무참히 점령당한 데 대한 파리시민의 분위기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생상스는 1871년 전쟁에 패한 뒤 프랑스 3공화국이 프로이센에 항복하고 휴전을 꾀하자 이에 반대하는 파리시민들이 자치정부인 ‘파리코뮌’을 세웠을 때 신변의 위협을 느껴고 영국으로 피신했다. 이러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영웅행진곡’에 그대로 반영된 듯하다.
‘영웅행진곡’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연주곡으로 작곡됐다가 이후 2관 편성의 오케스트라 곡으로 개작됐다. 이 곡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28세라는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프랑스 화가 앙리 르뇨에게 헌정돼 그해 11월 17일 초연됐다.
곡은 현악기 연주로 시작돼 목관악기로 이어진 뒤 다시 현악기에 이어 금관악기의 강한 울림이 터져 나온다. 트롬본 독주 부분이 비장함을 느끼게 하고 현과 드럼에 의해 웅장하고 빠르게 전환되면서 마무리된다. 처음 들으면 “이게 행진곡이라고?”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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