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 인공지능 스파이 시대
얼굴·걸음걸이 등으로 대상자 특정
달리는 차·군중 속에서 정확히 식별
외국 AI 의존땐 정보 유출·기만 우려
자국 통제력 중요·활용 능력 키워야
새해에도 가장 큰 화두는 역시 인공지능(AI)이다. AI라는 용어가 공식 출현하고 연구 분야로 확립된 것은 1956년이라고 하지만 대부분 사람이 체감한 것은 2022년 11월 오픈AI가 대화형 챗봇 챗GPT를 공개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AI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기술혁신으로 압도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단순한 기술 진보가 아니라 인류문명의 변곡점으로 인식되는 이유다.
국가 간 정보전에도 AI가 활용되지 않을 수 없다. 세계 각국은 늘 정보활동을 위해 당대 최고 기술을 다른 분야에 앞서 활용했다. 연합군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전기기계식 계산 장치 봄브(Bombe·전쟁 후반 개발된 전자식 컴퓨터 콜로서스의 전신)를 활용해 독일군의 절대 암호기인 에니그마(ENIGMA) 암호를 해독(울트라 작전)한 정보력 때문이었다. 울트라를 통해 독일군의 최고 전력이던 U보트(잠수함) 위치를 파악해 격침할 수 있었고, 독일이 보낸 스파이들을 역용하는 이중스파이공작(더블크로스 작전)을 지원, 상륙지점을 기만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정보전에서의 전략적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1974년 관련된 책이 발간되기까지 30여 년간 울트라의 비밀을 유지했다.
1950년대 미국 CIA는 소련의 레이다를 피할 수 있는 고고도 정찰기 U-2를 개발해 10년간 소련 영공을 마음대로 드나들며 영상정보를 수집했다. 이후 우주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첩보위성을 개발, 영상정보에서 소련을 압도했다. 통신감청을 위한 신호정보(SIGINT) 수집에도 인공위성과 잠수함이 동원되는 등 당대 최첨단 기술이 활용된 것은 물론이다.
정보전에서 기술 경쟁은 AI에서도 치열하다. 2024년 9월 미국 CIA의 윌리엄 번스 국장과 영국 MI6(비밀정보국)의 리처드 무어 국장은 파이낸셜타임스 공동 기고문을 통해 정보력에서 기술적 우위 확보는 필수적이라며, 두 기관은 이미 AI를 활용하고 있다고 공개했다.
CIA의 인공지능책임자(CAIO) 락슈미 라만도 지난해 4월 안보 관련 회의에서 “AI는 단순히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전략적 필수 요소며, 이미 적들이 AI를 활용해 전례 없는 수준으로 미국 안보를 위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AI가 CIA의 정보수집, 분석, 비밀공작, 방첩 등 모든 업무 분야에 통합돼 정보활동 수행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AI를 활용한 스파이전은 미래의 정보전이 아니라 이미 진행 중인 것이다.
분석, 해킹, 감시, 암살, 여론조작까지
정보기관에서 AI가 가장 먼저 도입된 분야는 정보 분석이다. 방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가치 있는 정보를 찾아내거나, 의미 없는 대량의 데이터를 연결해 새로운 정보를 생산해 내기도 하고, 입체적 분석을 통해 정보판단을 도와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지루하고 오래 걸리는 분석을 짧은 시간에 해낼 수 있어 극단적 효율성을 실현한다.
최근 각국에서 정보기관이 개입되거나 국가가 지원하는 해커 집단에 의한 대규모 해킹이 빈번히 발생하고 있는 것도 대량의 데이터가 필요하고, 공격 목표 분석과 해킹 툴의 개발에 AI가 동원돼 효율성을 크게 높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정보수집이나 방첩을 위한 감시활동에서도 얼굴이나 걸음걸이 인식 등으로 대상자를 특정하고, 행동 패턴을 분석해 미행 감시를 편리하게 해준다.
얼굴 인식 기술에서 앞서 있는 중국은 이미 베이징 대사관 거리에서 외국 정보요원을 식별하고 추적하는 데 이런 기술을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성문 분석을 통한 음성인식 기능으로는 통신감청 중 특정 타깃을 색출하고, 지속적 추적을 가능하게 해준다. AI로 대상자를 식별하고 정밀 공격을 통해 안전하게 암살 임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은 2020년 이란 핵과학자 모센 파크리자데를 주차된 무인 픽업트럭에 설치한 원격 작동 기관총으로 살해했는데, AI가 얼굴을 식별해 정밀 저격해 바로 옆자리에 있던 부인은 무사했다. 유엔은 자율살상무기시스템(LAWS)이 군사적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이 기술은 암살에도 활용될 수 있다. 얼굴 인식과 행동 예측 알고리즘을 탑재한 초소형 AI 드론이 특정 인물을 군중 속에서 식별, 자동 추적 후 직접 신체에 접촉해 폭발하는 방식의 표적 제거도 가능하다.
학계에서는 심장 박동기나 인슐린 펌프 등 의료기기에 대한 AI 기반 해킹 공격으로 간접 암살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우려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정보적 위협인 영향력 공작에서도 AI가 이미 활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정보활동 중 첩보 수집보다 상대국에 대한 영향력 공작의 위협이 커지고 있다. 사이버 공간과 SNS를 통한 여론조작을 위해 AI가 여론 분석과 콘텐츠 개발에 활용되고 있다.
영국 MI6의 신임 국장 블레이즈 메트러웰리는 지난달 취임 후 첫 번째 연설에서 AI, 생명공학, 양자컴퓨팅 같은 첨단기술과 전통적 첩보활동의 융합을 강조하면서도, 알고리즘을 활용해 허위 정보를 퍼뜨려 공동체를 분열하고 현실을 왜곡하는 영향력 공작의 심각성을 지적했다. 바야흐로 정보전의 모든 국면에서 AI가 활용되며 위험성이 빠르게 증폭되고 있다.
소버린 AI 확보가 정보력 판가름
지난해 1월 존 래클리프 신임 CIA 국장이 상원 청문회에서 강조한 것처럼 AI와 양자컴퓨터 등 첨단기술이 매우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인간 정보활동(HUMINT)의 중요성은 간과할 수 없다. 단순히 AI를 도입하는 것만 아니라 인간 정보활동과의 융합을 얼마나 잘 실현하느냐가 각국 정보기관의 경쟁력을 판가름할 것이다. 더구나 AI의 극단적 효율성과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영역의 개척 가능성을 고려할 때 그 차이는 지금까지 정보력 격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이다. 정보기관의 AI 전환 속도와 융합능력이 다른 어떤 분야보다 긴급하고 절실한 이유다.
또한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국산 소버린 AI의 개발이다. AI를 활용한다는 것은 AI에게 자신의 정보가 빨려나가는 결과를 초래해 보안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중국이 생성형 AI 딥시크를 발표했을 때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미국인들의 딥시크 사용을 막아야 한다고 백악관에 건의한 것도 이 때문이다. 구글과 오픈AI가 다른 나라 정보기관이 자신들의 AI(제미나이, 챗GPT)를 활용한 사례를 상세히 공개한 것도 정보 유출의 가능성을 반증해준 것이다.
정보기관의 업무를 외국 AI에 의존할 경우 정보 유출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서 작동이 불가능하거나, 기만을 당할 수도 있다. 정보, 국방, 외교 등 안보 관련 업무의 AI 활용에는 자국이 통제 가능한 AI를 활용해야만 하는 이유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소버린 AI 개발이 가능한 몇 안 되는 국가에 해당한다고 하는 만큼 민간 기업과의 협업을 통한 국가안보 분야 AI 개발과 활용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AI가 정보요원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AI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정보요원이 필요한 것이므로 직원들의 재교육이 시급하다. 신임 MI6 국장이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고위 간부를 포함한 모든 직원이 AI를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전 직원의 단계적이고 지속적인 교육을 강조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선진 정보기관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인지, 무늬만 정보기관으로 남을 것인지 판가름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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