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앞둔 전사들이여 ‘승리의 노래’를 불러라

입력 2026. 01. 13   16:06
업데이트 2026. 01. 13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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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 독일 통일의 마지막 퍼즐 보·불(프로이센·프랑스)전쟁과 브람스

보·오(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프로이센의 총리 비스마르크(1815~1898)는 다음으로 독일의 통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남독일의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등이 영향권 밖에 있었고, 프랑스는 여전히 프로이센을 견제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스트리아는 보·오전쟁 참패로 다시 군대를 동원해 올 상황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프랑스와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독일 통일을 위한 비스마르크의 전략
비스마르크는 우선 러시아제국 및 이탈리아왕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영국과도 친선정책을 유지함으로써 프랑스와 일전을 벌이더라도 유럽 전체와 싸우는 일이 없도록 사전 정지작업을 해나갔다. 일종의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1808~1873)가 지배하고 있었다.
당시 나폴레옹 3세는 인도차이나 및 이탈리아 원정과 크림전쟁, 멕시코 내전에 개입하는 등 세력을 확장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국제적으로 많은 원성을 받는 상황이었고, 전쟁이 개시되더라도 프랑스를 지원할 나라가 없을 정도로 외톨이가 돼 있었다. 특히 이탈리아와는 감정의 골이 깊은 상태였다. 왜냐하면 1830년 이탈리아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가 이를 진압하러 왔을 때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개입했으나 나중에 보니 오스트리아와 뒷거래를 했고, 이를 대가로 일부 지역을 할양받은 뒤 중간에 전쟁에서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이탈리아는 통일전쟁에서 실패했다.

1870년 9월, 전투를 준비 중인 트르시의 프로이센군 야전포병.
1870년 9월, 전투를 준비 중인 트르시의 프로이센군 야전포병.


스페인 왕위계승 문제와 ‘엠스 전보사건’ 
보·불(프로이센·프랑스)전쟁의 결정적인 도화선은 스페인에서 촉발됐다. 스페인의 왕은 1700년 이후 계속해서 프랑스의 부르봉왕조와 뿌리가 같은 브르본 왕가에서 계승해 왔다. 그런데 1868년 스페인 여왕이 혁명으로 쫓겨나면서 왕위를 새로 옹립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스페인에서는 이를 프랑스가 아닌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1797~1888)의 친척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빌헬름 1세도 이를 반대함에 따라 결국 이탈리아 북부 왕국에 제안해 왕위를 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스페인 왕위 문제를 프랑스가 아닌 프로이센에 제안한 것부터 불편했고, 간섭을 저울질하는 상황이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보냈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러한 일이 없도록 문서로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로이센 주재 프랑스대사는 빌헬름 1세가 휴양차 머무르고 있는 독일 서부 라인란트팔츠주의 작은 마을 바트엠스(Bad Ems)로 가서 예고도 없이 면담을 요청해 이러한 내용을 전달하려 했다. 빌헬름 1세가 휴양 중인 상황에서 프랑스대사가 불쑥 찾아와 비공개 면담을 요청함에 따라 이뤄진 이 면담을 흔히 ‘엠스 전보사건’이라고 부른다.

언론의 왜곡된 보도, 양국 국민 감정을 자극
빌헬름 1세는 프랑스대사가 전달한 나폴레옹 3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이러한 행태에 대해 프로이센을 무시하는 처사로 보고, 빌헬름 1세의 답신 내용을 일부 수정해 언론에 흘렸다. 그리고 “휴가 중인 황제에게 다짜고짜 찾아와 무례한 요구를 늘어놓은 프랑스대사를 빌헬름 1세가 열 받아서 쫓아냈다”는 식으로 확대 보도하게 했다. 또한 프랑스에서도 프로이센의 언론 보도를 괘씸하게 보고 이에 대해 “그저 질문하러 간 우리 대사를 빌헬름 1세가 문전박대한 것은 물론 일부러 ‘부사관 나부랭이’에게 회신을 들려보내 모욕을 줬다”는 식으로 왜곡 보도했다. 결국 이러한 왜곡된 보도는 양국 국민의 감정을 건드리는 도화선이 됐음은 물론 전쟁도 불사할 정도로 민심을 들끓게 했다. 

또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벨기에를 강제로 병합하는 것을 논의하고 있다는 내용을 언론에 흘렸다. 이는 영국이 1830년 조약을 통해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을 보장한다고 했던 것에 정면으로 대립하는 내용이었다. 영국은 다시 한번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밝혔다. 이로써 영국과 벨기에 등 각국에서 반프랑스 여론이 확산했다. 결국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7월 19일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보·불전쟁이 시작됐다.

브람스의 ‘승리의 노래’ 자필악보 표지.
브람스의 ‘승리의 노래’ 자필악보 표지.


선승 이후 구전(先勝 以後 求戰)의 프로이센 전쟁 준비
하지만 당시 양측의 전쟁 준비 상황은 매우 달랐다. 즉, 양측 모두 언젠가는 반드시 다시 전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준비하고 있었으나 그 상태는 사뭇 달랐다. 프랑스는 그동안 해외에 대한 세력 확장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해군력은 많이 양성됐지만 육군의 준비는 충분하지 않았다. 대규모 전쟁을 위한 대비가 없어 프로이센과의 전쟁 준비 수준은 높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프로이센은 재상 비스마르크와 육군참모총장 몰트케 장군을 중심으로 착실히 준비했다. 게다가 4년 전 보·오전쟁을 통해 실전 경험도 쌓았다. 특히 몰트케 장군은 병력 동원과 훈련, 그리고 철도를 이용한 부대 전개, 발사 속도와 사거리가 늘어난 소총의 보급 등 태세가 잘 갖춰졌고, 프로이센의 일반참모 제도로 양성한 참모조직도 전력이 강했다. 싸우기 전에 이미 프로이센의 승리는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프랑스군은 선전포고를 했음에도 7월 말까지 동원이 채 이뤄지지 않았고, 프로이센에 대해 제대로 된 공격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프로이센군은 대규모 병력을 일사불란하게 라인강 서안, 프랑스와의 국경지대로 이동시켜 대비하고 있었다.

브람스, 프로이센의 승리를 기원!
독일의 작곡가 브람스는 프랑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프로이센군의 승리를 염원하며 1870년 가을부터 솔로와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승리의 노래(Triumphlied)’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모두 3악장의 곡으로 1악장은 빌헬름 1세가 황제로 선포된 이후 완성했다. 2악장과 3악장은 1871년 여름에 완성했다. 당시 빌헬름 1세에게 이 곡을 헌정했지만, 실제로 브람스가 존경한 인물은 비스마르크 총리였다. 초연은 1872년 6월 이뤄졌다. 

1악장에는 ‘Lebhaft und feierlich(활기차고 축제적)’이라고 표시돼 있다. 주제는 독일제국의 비공식 국가인 ‘그대에게 승리의 왕관을(Heil dir im Siegerkranz)’을 모티브로 요한묵시록 19장의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즉, 묵시록에서는 야수를 죽이고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이야기한다. 이는 게르만과 반대되는, 문화와 예술의 수도로 간주되는 파리에 대한 독일의 승리를 암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2악장은 적당히 활기차고 G장조로 시작하며, 합창은 “우리의 신을 찬양하라(Lobet unsern Gott)”를 후렴구로 하는 짧은 성가 방식을 사용했다. 3악장에서는 찬송가 “다 감사드리세(Nun danket alle Gott)”를 삽입함으로써 할렐루야의 부활을 상징하는 내용을 강조했다.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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