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아바이 마을, 가자미식해가 있는 풍경

입력 2026. 01. 08   14:57
업데이트 2026. 01. 08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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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책 - 그때 그곳 : 고향이 그리워도 못 가는 신세

속초 바닷가 아바이마을은 아버지라는 뜻의 함경도 사투리 ‘아바이’라는 말에서 왔듯이 1951년 1·4 후퇴 때 피란민이 월남해 정착한 마을이다. 설악산이 배경처럼 둘러싸고 있고, 석호인 청초호를 격한 채 육지와 떨어져 있는 섬 아닌 섬의 형태다. 전쟁이 끝나면 돌아갈 요량으로 흥남에서 가장 가까운 남한 땅을 고른 게 이곳이었다. 1953년 7월 휴전으로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계속 머물러야 했던 슬픔의 공간이다. 

처음 내렸을 때는 한적한 모래사장이었다. 잠시 머물다가 간다는 생각으로 얼기설기 집을 지어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모든 걸 고향에 남겨둔 채 간단한 피란 짐만 꾸려 도망치듯 내려왔으니 빈손들이었다. 도움을 기댈 데도 없었다. 생계를 잇기 위해 뱃일이건 시장통 잡일이건 가리지 않고 매달렸다.

가자미식해.
가자미식해.


아바이마을은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 했던 실향민의 애환을 품고 있다. 1200여 가구에 3600여 명이 거주한다. ‘아바이마을길’은 폭 1m 남짓한 좁은 골목길이어서 70여 년 전 마을이 처음 생겼을 때의 시간을 온존하고 있다. 처음 와보는 젊은이들이 연신 카메라에 담는 풍경이다. 다리 아래에는 마을의 역사를 알게 하는 사진과 벽화들이 전시돼 있다.

실향민은 호수 건너 속초 시장으로 가려면 거룻배로 건너야 했다. 마을이 육로로 시내와 연결된 지금도 사람들은 50m 거리를 줄을 잡아당겨 가는 무동력선 ‘갯배’를 선호한다. 대교를 이용하면 돌아가야 하는 불편함이 귀찮은 탓이다. 속초 시민은 무료인 데 비해 외지인 관광객에게는 편도 승선료 500원을 받고 있다. 마을 입장료인 셈이다.

구보는 1973년 처음 와본 이 마을에서 진한 ‘함경도’를 느낀 기억을 갖고 있다. 실향민의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도 이색적이었지만, 하나의 음식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가자미식해였다. 함흥냉면, 오징어순대와 함께 실향민이 직접 만들어 생계 수단으로 삼던 함경도의 맛이었다.

설악대교에서 내려다본 아바이마을.
설악대교에서 내려다본 아바이마을.


가자미는 찬 바람 불기 시작하는 10월부터 제철이 시작되는 동해의 생선이다. 이 가자미를 소금에 절여 잘게 썰어 좁쌀과 무, 고춧가루, 엿기름을 넣고 버무려 발효시켜 담근 음식이 가자미식해다. 구보가 한국 음식 가운데서도 매력적인 것으로 꼽고 싶어 하는 메뉴에 속한다. 이북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진한 향수를 안기는 음식이다. 북녘에서는 가자미를 식해로도 먹고 냉면 고명으로도 썼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인 시인 백석(1912~1996)의 조촐한 밥상에도 올랐다.

백석은 ‘가재미’만 있으면 서러워도 외로워도 세상 부러울 것 없는 마음이 됐던 모양이다. 가자미가 ‘맑은 물밑 해정한 모래톱에서 허구 긴 날을 모래알만 헤이며 잔뼈가 굵은 탓’이라 했다. 살아온 과정이 자기와 닮았다고 여긴 것이다.

‘식해’는 생선을 깨끗이 손질해서 항아리에 담아 소금으로 절인 후 조밥에 버무려 익히는 음식이다. 한자로는 ‘食?’라고 쓴다. 한자에서 ‘해(?)’는 젓갈을 뜻한다. 옛사람들이 생선이나 어패류, 새우 등에 소금을 조금 섞어 절이면 특유의 향과 맛을 낸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라고 구보는 평가한다.

미작(米作) 생산지역인 한·중·일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처음 개발된 것으로 전해진다. 생선을 오래 보존해 쌀밥을 맛있게 많이 먹기 위한 반찬 기능 때문이었을 것으로 구보는 추측한다. 후에 소금 대신 곡물로 발효시키면 생선의 살과 뼈가 흐물흐물해지고 곰삭은 맛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음식문화사에 일대 전환이 일어났다.

소금을 구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요긴한 대체법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태국의 ‘쁘라하’, 라오스의 ‘빠솜’, 캄보디아의 ‘뿌러혹’ 등이 모두 그러한 소산물이다. 이것이 중국 남부를 거쳐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래됐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왕비의 납폐 품목에 ‘장(醬)’과 함께 ‘해(?)’가 포함된 사실에서 우리 선조들이 이 시기에 이미 곡물로 만든 밥이나 전분질에 해물을 섞어 ‘식해’를 만들었음이 확인된다. 전분이 발효하면서 생기는 유산이 신맛을 내고 부패를 막아준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소금으로 절이는 젓갈과 곡물로 발효시키는 식해를 구분한다. 비린내를 잡고 고소한 맛을 내도록 돕는 곡물로 생선을 갈무리한 데는 소금이 비싸거나 귀했던 시공간의 조건과 맞물린 까닭이 작용했을 것으로 구보는 추측한다.

엿기름과 고춧가루가 투입된 것은 그로부터 10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다. 그 음식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해온 지역이 함경도인 셈이다. 가자미 덕이 아닐 수 없다 여긴다. 조갯살을 밥알과 함께 엿기름에 버무려 담는 황해도의 별미 ‘연안 식해’도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식해 재료로는 아무래도 가자미를 꼽지 않을 수 없다.

구보는 1990년대 초 베이징 주재 시절 그 가자미와 조우한 적이 있다. ‘금강원’이라는 북한 음식점에서였다. 그리워했던 가자미식해를 이역에서 만났으니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제대로 된 재료와 전통의 제조법을 충실히 따른다면 가자미식해는 다른 맛이 있을 수 없다. 그 원 맛을 찾았으니 구보의 반가움은 커서 사흘이 멀다 하고 찾았다. 재미있었던 기억은 복무원들의 표현법이었다. 주문을 하면 요리를 가져오며 어김없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가자미는 조국에서 온 거란 말입니다!”

‘조국’의 ‘조’와 ‘말입니다’의 ‘니다’에 힘이 실리는 말투였다. 들을 때마다 평안도 액센트도 이채로웠지만, 그 말뜻이 뜬금없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곤 했다. ‘제대로 된 귀한 재료로 만든 것이니 영광으로 알고 먹으라’는 으스댐이 작용한 말투였을 것이다. 지금도 확신하지만 그곳의 가자미식해며 명태찜의 맛은 서울에선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맛이었다. 두 음식 모두 재료나 제조법이 함경도이고 보면 구보의 평가가 그러해도 지나친 게 아닐 터이다.

아바이마을 실향민들이 수작업으로 만들어 내다 팔던 가자미식해는 1980년대 이후부터 공장 생산으로 바뀌었다. 구보는 새해 초 아바이마을 바닷가에 서서 함경도 풍경 속에서 가자미식해를 먹고 싶다는 염원에 빠진다. 함흥 어디쯤에서 물 좋은 노랑가자미와 북관(北關) 좁쌀로 만든 오리지널 식해를 맛보게 되면 벅찬 감동에 목이 멜지도 모르겠다 여긴다. 사진=필자 제공

 

안상윤 전 언론인
안상윤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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