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많이 가는 특별함에 겨울이면 더 손이 간다

입력 2026. 01. 05   16:36
업데이트 2026. 01. 05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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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의 역사
캐시미어가 우리 옷장에 오기까지

천년 전 인도 카슈미르 계곡서 직조
16세기 ‘숄’ 무굴 궁정 복식으로 사용
꾸준한 수요에 프랑스서 모방품 등장
1·2차 세계대전 후 니트 의류로 확산

 

캐시미어 의류를 착용하고 있는 여성 모델. 로로피아나 제공
캐시미어 의류를 착용하고 있는 여성 모델. 로로피아나 제공

 


우리는 겨울옷을 고를 때 라벨을 한 번쯤 들여다본다. 소재 표기 중에서 ‘캐시미어(cashmere)’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이 섬유가 들어간 코트와 니트는 대개 가격이 높고 보풀, 보관, 세탁 온도 같은 관리 요령에 대한 주의문도 따라붙는다.

캐시미어가 가진 막연한 ‘고급’이라는 인식은 이 섬유가 걸어온 길을 망각하게 한다. 이 단어가 왜 고급 옷의 대명사로 쓰였는지, 어떤 지역과 관계가 있는지, 왜 지금도 매우 특별한 취급을 받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이번 칼럼에서는 캐시미어가 어떻게 오늘날 우리 옷장까지 왔는지를 따라가 본다.

캐시미어의 역사는 약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무렵 인도 북부 카슈미르 계곡에서는 이미 캐시미어 숄이 직조되고 있었다. 이 숄은 히말라야 북쪽 라다크 고원(오늘날 인도 북부)을 거쳐 중앙아시아 상로(商路)로 이동했으며, 비단길(실크로드)을 통해 서쪽으로 전파됐다.

예나 지금이나 카슈미르 일대는 고도가 높고, 겨울 기온이 낮았다. 이 환경에서 살아가는 염소는 털을 두 겹 기른다. 바깥에는 굵은 털이 자라나 비와 바람을 막는다. 안쪽에는 가는 털이 있어 피부 온도를 유지한다. 겉털은 섬유로 부적합했기에 캐시미어는 이 속털만을 썼고, 직조공은 이 털의 차이를 경험으로 구분했다.

 

 

캐시미어 원산지인 카슈미르 지역의 인도 라다크에서 기르는 염소. 필자 제공
캐시미어 원산지인 카슈미르 지역의 인도 라다크에서 기르는 염소. 필자 제공

 


해마다 염소 한 마리에게서 얻을 수 있는 속털은 한정적이다. 현대 기준으로 150~200g이며, 이 수치는 과거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성인 스웨터 한 벌을 만들기 위해서는 염소 4~6마리 정도의 분량이 드는데, 중세까지 제한적인 원료 수급과 더불어 가내수공의 기술적 열악함 때문에 생산 속도는 더 느렸다.

속털 채취는 주로 봄에 이뤄졌다. 털갈이가 시작되면 목동은 빗으로 속털만을 긁어내 세척한 뒤 실을 뽑았다. 모든 공정은 가내수공업에 의존했고, 추가로 운송비용과 상인 중개료가 따라붙었다. 가격은 희소성 하나로 설명되지는 않는다. 생산 인력, 선별 시간, 이동 거리, 거래 단계가 가격을 책정한다. 요컨대 생산 속도가 느리고 유통 과정이 복잡해 11세기와 15세기 사이 캐시미어는 대량 유행 상품이 되기에 어려움이 있었다.

16세기 카슈미르 계곡의 캐시미어 숄 생산 방식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한 집안에서 실을 뽑고 숄까지 짰지만 이 시기부터는 작업 양상이 변화했다. 고원에서 들어온 원료를 모으는 상인이 생겼고, 실을 뽑는 집이 따로 나타났다. 그러자 그 집에 기거하며 숄을 짜는 일을 도맡는 직조공이 등장했다. 아예 염색만 따로 맡는 염색 공방도 들어섰으며, 문양을 그리는 장인은 생산 공정의 마지막 단계에 자리했다. 기계가 적극 도입된 것은 아니지만 분업화가 시작된 것이다. 기존 한계를 자생적으로 극복하고 생산량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려는 시도였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를 하게 된 변화는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이 변화는 수요에서 시작됐다. 무굴제국이 북인도를 장악한 뒤 카슈미르 숄은 궁정 복식으로 쓰인다. 16세기 무굴 궁정 기록에는 캐시미어 숄이 하사품으로 등장한다. 대신과 장군은 공식 자리에서 이 숄을 두른다. 이란 사파비 왕조도 비슷했다. 캐시미어 숄은 외교 예물로 오갔고, 왕과 대신이 쓰는 물건이 되면서 기준이 세워졌다. 가령 숄 크기를 일정하게 맞춘다든지, 좌우 무늬를 어긋나지 않게 짠다든지, 거기에 염색은 여러 번 씻어도 색이 빠지지 않아야 한다는 등 다양한 기준이 요구됐다.

고원 아래에서 세워진 기준은 생산지를 변화시켰다. 상인은 원료를 선별해 수급했고, 직조공은 실 굵기를 엄격하게 맞추기 시작했다. 문양을 새겨 넣는 장인은 정해진 도안을 조수들과 함께 완성했다. 카슈미르 숄은 이 시기부터 ‘만들어 쓰는 물건’이 아니라 ‘만들어 파는 상품’으로 취급됐다.

 

 

1812년 피르민 마소트가 그린 캐시미어 숄을 두른 황후 조세핀 초상화. 러시아 에르미타시박물관 소장
1812년 피르민 마소트가 그린 캐시미어 숄을 두른 황후 조세핀 초상화. 러시아 에르미타시박물관 소장



17세기와 18세기 초 유럽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카슈미르 숄을 소량 수입했다. 이는 귀족들의 수집품에 가깝게 귀하게 여겨졌다. 이들은 망토처럼 두르거나 장식 천으로 사용했다. 오래전 기록에는 ‘동방 숄’이라는 표현만이 보이며 이때까지 카슈미르에서 만들어진 숄을 막연히 ‘캐시미어’라 부를 뿐이었다. 이름도, 용도도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전환점은 전쟁 속에서 왔다. 1798년 이집트에서 원정 중이던 나폴레옹은 카슈미르 숄을 파리로 보냈다. 이 숄은 상류층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프랑스가 카슈미르 숄을 처음으로 ‘모방해서 만들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했고, 전 유럽이 캐시미어 숄을 ‘제품’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 속에서 ‘캐시미어’는 더 이상 카슈미르 지역에서 만들어진 숄만을 의미하지 않게 됐다. 즉, ‘카슈미르 고원 염소 속털로 만든 섬유’를 써서 만든 ‘숄’이라는 개념 분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1799년 프랑스 랭스에서 윌리엄-루이 테르노는 ‘인도 숄’ 모방품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카슈미르 원료가 아니라 스페인 메리노 양모로 비슷한 질감을 흉내 냈다. 파리 상류층은 이를 구매해 착용했다. 1800년대 초 프랑스 제국 조제핀 황후는 숄을 즐겨 걸쳤는데, 허리선을 가슴 밑으로 올린 엠파이어 라인 드레스는 숄을 고정하기 쉬웠고, 얇은 드레스와 큰 숄의 조합은 크게 유행했다.

1804년 자카드 직기 특허는 복잡한 무늬를 직물에 빠르게 찍어 넣는 길을 열었다. 1805년 스코틀랜드 페이즐리 공방은 카슈미르 숄 모방 생산을 시작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 무늬가 더 정교해졌다. 당시 시장은 ‘더 복잡한 무늬, 더 큰 숄’로 경쟁했다.

1818년 테르노는 페르시아 원정대를 꾸려 카슈미르 염소 1500마리를 사서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1819년 봄 프랑스 항구에 도착한 개체는 256마리뿐이었다. 이후 프랑스 내에서 캐시미어 원료를 직접 수급하려 시도했지만 염소의 환경 적응도가 낮아 직접 원료를 생산하긴 어려웠다. 결국 유럽은 현지 원료에서 해외 수입 원료에 현지의 방적·직조 기술을 더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캐시미어 수요는 꾸준해 이후에도 다양한 장비 개발이 끊이지 않았다. 1890년 마침내 스코틀랜드 캐시미어 가공 업체 도슨인터내셔널이 탈모기 개발에 성공한다. 이로써 탈모 과정이 이전보다 월등히 수월해져 캐시미어 대중화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에 걸쳐 일어난 두 차례 큰 전쟁은 캐시미어 소비세를 크게 둔화시켰다. 먼저 1차 세계대전(1914~1918)은 민간 사치품 생산을 감소시켰다. 군수와 배급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이는 2차 세계대전(1939~1945) 때도 같았다. 숄은 다시 특별 주문품으로 밀려났다. 이 시기 유럽 시장은 캐시미어를 ‘유행품’보다 ‘희귀 섬유’로 기억했다.

전쟁이 지나가고 캐시미어는 숄을 벗어나 옷에도 사용된다. 1947년 오스트리아 출신 섬유업자 베른하르트 알트만은 얇고 가벼운 보온재가 필요한 수요를 포착, 미국에서 캐시미어 스웨터를 대량 판매하며 ‘숄’ 중심 수요를 ‘니트 의류’로 전환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중국과 몽골이 원료 생산의 중심이 됐다. 고원에서 속털을 얻고, 방적과 편직은 도시 공장이 맡는다. 염소가 살아 있는 한 털은 다시 자란다. 이 점에서 캐시미어는 섬유 채취 과정만 놓고 보면 지속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라벨에 적힌 캐시미어는 카슈미르 숄, 유럽 모방 산업, 전후 니트 의류 확산을 거쳐 오늘날 우리 옷장까지 왔다. 추운 나날이다. 따뜻함을 꺼내 입으며 그 속에 담긴 역사도 함께 떠올려 본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이상희는 수원대 디자인앤아트대학 학장 겸 미술대학원 원장, 고운미술관 관장, 패션디자인학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며 (사)한국패션디자인학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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