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 ‘시작의 마지막’ 이겨내다

입력 2026. 01. 01   15:55
업데이트 2026. 01. 01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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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엔 늘 기대와 불안이 상존한다. 특히나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군 생활의 시작점은 더욱 그러하다. 2025년 마지막 해병대 훈련병이자 2026년 첫 이등병인 1324기 장병들은 지난달 22일 해병대교육훈련단에서 ‘시작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었다. 글=맹수열/사진=조용학 기자

훈련병들이 세줄도하를 하고 있다.
훈련병들이 세줄도하를 하고 있다.

 

#1 생전 처음 내려다보는 15m 아래 땅은 공포 그 자체다.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함일까? 잠시 밑을 내려다본 5321번 훈련병은 연신 성호를 그었다. 그리고 잠깐 주어진 대기 시간. 긴장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긴장되고 무서운 것은 사실이지만 긴장하면 안 되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은 척하고 있습니다.” 약간 모순된 말 속에서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2 가는 로프 하나에 의지해 지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약간 허우적거리는 듯했지만 5321번 훈련병은 과감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5시간처럼 느껴진 5분. 드디어 무사히 지상에 안착할 수 있었다. 장비를 반납하고 뛰어오는 그에게선 해냈다는 만족감과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시작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생애 첫 레펠에 성공한 5321번 훈련병. 그의 이름은 조영건이었다.

1324기 장병들은 이날부터 극기주에 돌입했다. 극기주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산악기초훈련과 각개전투, 야간사격, 천자봉 고지정복 등 고강도 훈련이 이뤄지는 해병 양성 과정의 꽃이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훈련에 몰두한 이들은 이날 산악전훈련장에서 기초레펠 훈련을 받았다.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교관의 설명을 듣는 훈련병들의 집중도는 기대 이상이었다. 훈련에 임하는 자세는 이미 완성된 해병이라고 교관들은 몰래 귀띔했다. “주를 거듭할수록 자세와 목소리가 가다듬어지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임무를 완수할 수 있는 해병으로서의 마음가짐이 자리잡고 있는 셈이죠.” 정지성(중사) 소대장은 훈련병들이 들을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어진 조교의 시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자세와 보폭으로 레펠을 마친 조교들의 모습에 훈련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보냈다. 흥분된 감정도 잠시. 15m 절벽을 수직으로 내려와야 하는 시간이 닥쳐옴에 따라 훈련병들 사이엔 긴장감이 맴돌았다.

“교관님이 알려주신 대로, 조교님이 보여주신 대로 하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레펠을 앞둔 김건희 훈련병은 긴장감을 떨쳐내려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키우며 이렇게 말했다.

“산악! 훈련! 산악! 훈련!” PT체조를 받는 훈련병들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산 속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장병들은 레펠을 시작했다. 15m 높이의 훈련장 발판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들도 있었지만 “할 수 있다!”는 교관의 격려에 하나둘 용기를 내 하강에 나섰다.

훈련장 아래서 바라본 훈련병들 대부분은 어색하고 서툰 모습이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레펠이 익숙하다면 그것이 더 비현실적일 터. 그럼에도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함으로 가득했다.

기어이 하강에 성공한 장병들의 얼굴엔 성취감이 가득했다. 훈련병 특유의 군기와 해병 특유의 자신감도 돌아왔다. 레펠 전 만났던 김 훈련병은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별것 없었습니다!”라며 웃어 보였다.

극기주는 이제 막 시작됐지만 스스로의 한계를 극복한다는 ‘극기(克己)’는 이미 훈련병들의 가슴속에 가득해 보였다. 어쩌면 해병대라는 미지의 영역에 발을 내디딘 순간 이미 극기는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아이돌그룹 출신 배우에서 해병대 수색대원으로 거듭난 권현빈 훈련병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1323기에서 군악대로 들어왔다가 수색대원이 꼭 되고 싶어 1324기로 다시 입대했습니다. 새해엔 수색대 이등병으로 제 꿈을 이룰 수 있게 돼 뿌듯합니다. 몸과 마음 모두 건강한 해병으로서 국민과 조국에 헌신하겠습니다.”

한국·러시아 다문화 가정에서 온 이안톤 훈련병 역시 극기를 위해 해병대로 향했다. 연평부대 특수수색대대 부사관으로 복무했던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해병을 선택했다는 그는 이야기 중 잠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아버지께선 생전 해병대에 대한 자부심을 자주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해병대에 대한 동경이 있었습니다. 2024년 초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 이후로 잠시 방황하기도 했지만, 이제 아버지처럼 멋진 해병이 되고자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하늘에서 보고 계실 아버지께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지난달 31일 수료식을 마친 1324기 해병들은 병오년(丙午年)을 시작하는 2일 자랑스러운 빨간명찰을 달고 실무부대에서 정예 해병으로서 새 출발을 한다. 새해는 마음속에 ‘극기’를 품은 1324기 해병의 힘찬 함성으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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