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울릉도, 민간이 지켜낸 국토
독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곳이다. 구보가 독도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일출 때문이었다. 1984년 1월 1일 이곳에서 최초의 생방송을 진행했다. 처음 대한 독도는 고절하고 아름다웠다. ‘국토의 동단’이라는 공간성이 주는 비장감이 엄습해 왔다. 독도는 해발 99m와 169m인 두 화산섬으로 구성돼 있다. 강원 울진현에 속해 있던 울릉도가 고종 37년인 1900년 울도군으로 승격하면서 독도는 울도군의 부속도서로 지정됐고, 1914년에는 경상북도에 편입됐다(울릉군).
‘우산(독도)과 무릉(울릉도)은 멀지 않아 풍일이 청명하면 바라볼 수 있다’는 『고려사지리지』의 기록대로 울릉도에서 독도가 조망된다. 두 섬 간 거리는 87㎞다. 이정수 사진작가가 2023년 새해 아침 울릉도에서 망원렌즈로 찍어 보내온 사진 속에는 원단 일출에 휩싸인 독도의 장엄한 모습이 들어 있어 구보에게 특별한 감동을 줬다.
울릉군은 우리나라에서 면적이 가장 작고, 인구가 가장 적은 기초자치단체다. 울릉도는 73㎢ 면적에 1읍 2면을 뒀으며, 8700여 명이 거주한다. 울릉도는 여전히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화산섬이다. 독도·울릉도 해역은 수심이 깊고 맑아 예로부터 어종의 보고였다. 떼배 위에서 전갱어를 바가지로 퍼올리고 꽁치는 손으로 잡았다. 쓰시마 난류와 시베리아 기단이 조성하는 차가운 북서풍 영향으로 온난습윤해 겨울 적설량이 많다. 일제강점기에 성인봉 나리분지에서 스키 대회를 열었을 정도다. 대설과 태풍 때면 섬은 고립된다. 구보도 폭설로 이 섬에 발이 묶여 완벽한 백색의 세계에서 일주일을 지낸 적이 있다. 신비하고 황홀했다.
역사에서 울릉도는 힘들고 외로웠다. 명칭도 수시로 바뀌었다. 구보는 꾸준한 통치가 없던 탓으로 여긴다. 삼국시대에 우산국으로 존재하다가 512년 신라 지증왕 때 이사부에게 정벌당했다. 고려에는 조공을 바치며 속국으로 지냈다. 930년 고려 태조 때 공물을 바치고, 정위·정조 등의 관직을 받은 기록이 『고려사절요』에 전한다. 이후 여진 해적과 왜구의 잦은 침략에 고려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서 유명무실한 채로 존재했다. 우산국 백성들이 1022년 고려 본토로 도망쳐 나오자 예주(경북 영덕)에 정착시킨 기록도 보인다(『고려사』). 1157년에 이르러 의종이 명주도감창 김유립을 보내 새삼 섬을 살피게 한 사실에서 구보는 그동안 섬이 방치돼 왔음을 확인한다.
조선이 들어서자 군역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이 섬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1403년 태종은 ‘왜구가 노략질을 일삼는 것은 주민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공도령(空島令)을 실시했다. 당시 우산도의 가구 수는 15호, 주민은 86명이었다. 1416년 안무사 김인우가 설득작업을 폈지만 섬을 떠난 이는 3명에 불과했다(『태종실록』). 1417년 공도령이 강제성을 띠면서 섬 주민 전원이 퇴출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럼에도 왜구 출몰이 줄어들지 않자 1419년 태종은 왜구 소굴인 쓰시마 정벌을 단행했고, 한동안 왜구는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17세기 초 임진왜란 이후 중앙정부 통제가 약해지면서 왜구가 다시 출몰했다. 광해군 때는 일본이 ‘울릉도를 탐시하겠다’고 알려왔으나 동래부로 하여금 배척하도록 했다. 숙종 때는 일본 어민이 의죽도(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표류해온 기록이 예조의 단자에 전한다(『숙종실록』). 조선이 방치하는 사이 울릉도는 오랫동안 일본이 무단 점유하다시피 했음을 알 수 있다.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일본의 주장은 이 시기 상황에서 비롯됐다. 1693년 ‘울산의 어부 두 명이 울릉도에 떠내려가 왜인에게 붙잡혀 대마도를 통해 돌아왔다’는 기록이 그 상황을 대변한다.
이 두 어부는 안용복과 박어둔이다(『변례집요』 『증정교린지』). 이들은 표류한 게 아니라 일본 어선들의 불법조업을 항의하다가 끌려간 것이었다. 노 젓는 수군(水軍) 신분으로 부산의 왜관(倭館)을 자주 드나들 기회가 있어 일어를 익혔던 안용복은 일본에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역임을 역설했다. 막부는 울릉도를 무인도로만 여겨 어선의 출어를 허락해 오다 안용복의 항의를 받고 ‘울릉도 해역에 가지 않겠다’고 약조했다(『숙종실록』 20년 8월 14일). 이러한 사실은 일본 시마네현 무라카미 가문이 소장해 오던 막부의 서계에서도 교차 확인된 바 있다. 문서에는 ‘죽도(울릉도)와 송도(독도)는 강원도에 속함’이라고 기재됐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안용복을 계기로 두 나라는 국경에 관한 외교 교섭을 진행했지만 순조롭지 않았다. 일본 어선들이 울릉도 근해에서 계속 조업을 하자 1696년 안용복이 독도까지 추격해 문책한 뒤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을 자칭하며 담판을 지으려 다시 도일했으나 실패하고 송환됐다(『만기요람』). 조선 조정은 안용복에게 관원 사칭의 죄를 물어 귀양을 보냈다. 이긍익과 이규경, 남구만 등 선비들이 안용복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사형은 면했다. 이후 안용복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일본 어선들의 불법조업은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됐다. 그럼에도 조선 정부는 울릉도를 계속 무인도로 뒀다. 18세기 후반 다산 정약용은 ‘지리가 정치의 근본’이라고 강조하며 울릉도를 오랫동안 공도로 두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다산시문집』).
울릉도를 챙겼던 첫 공직자는 김옥균(1851~1884)이었다. 1883년 동남제도개척사 직을 맡으면서 울릉도 목재를 일본에 수출하고 ‘고래잡이가 국가를 부유하게 한다’며 동해에서 실천에 옮겼다. 당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에서 포경사업으로 부를 축적하는 현상을 목도했기 때문이었다. 울릉도에 호남 출신 어부들을 정착시켜 유인도로 만들었다. 검찰사도 파견해 행정을 폈다. 개척민들은 울릉도에서 조망되는 우산도를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 ‘독섬’으로 불렀다(『이규원 검찰일기』). 이것이 독도(獨島)의 어원이 됐다. 망망대해에 ‘홀로선 섬’이라는 뜻도 가미됐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6·25전쟁 기간에는 혼란을 틈 타 일본이 독도에 들어와 영토 표석을 세우고 순시선을 앞세워 여러 차례 침투를 벌였지만 홍순칠 등 울릉도 청년들이 1953년 의용수비대를 결성해 기관총과 박격포로 물리쳤다. 구보는 독도와 울릉도를 대한민국의 강역으로 지켜낸 배경에는 민간 역할이 있었다고 평가하며 그들에게 감사한다. 사진=울릉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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