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밝았다. 다들 2026년의 첫 해돋이를 보기 위해 새벽부터 동분서주했을 터. 그러나 해는 내일도 뜬다. 북적이는 1일보다 오히려 이번 주말이 기회일지도 모른다. 인파에 치이지 않고 여유롭게 일출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조금 천천히, 여유롭게 새해를 맞이하는 것으로 생각하자. 그래도 해돋이는 역시 동해안에서 보는 게 제맛이다. 수평선 위로 떠오르는 해만 바라보고 올 게 아니라면 강원 속초시는 어떨까. 새해를 맞아 몸과 마음을 든든히 꽉 채워 보는 거다. 속초는 작은 도시다. 하루면 충분히 속초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을 만큼 집약적이다. 설악산이 바로 뒤에 버티고 있고, 동해가 코앞에 펼쳐진다. 실향민들이 만들어 낸 독특한 음식문화가 살아 있고 힙한 카페와 수제맥주 브루어리까지 들어섰다. 주요 명소 간 거리가 가까워 택시 여행자도 부담 없다. 뭔가 하나에 꽂히면 그걸로 충분한 여행지다. 해돋이든, 케이블카든, 닭강정이든. 새해 첫 여행지로 속초는 어떨까.
맛있는 음식으로 가득한 속초관광수산시장.
영금정, 바다 위에서 맞는 새해 일출 영금정은 속초시내에서 가장 가까운 해돋이 명소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거문고 소리를 닮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바다 위로 뻗은 50m짜리 다리를 건너면 정자가 나온다. 발밑으로 파도가 치고, 눈앞에는 수평선이 펼쳐진다. 가리는 게 없어 해가 뜨는 순간을 온전히 볼 수 있다. 새벽 공기가 차갑긴 하지만, 그 차가움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해 준다. 해가 올라오면서 하늘이 분홍빛으로 물드는 광경을 보면 새해 다짐 같은 것도 괜히 하게 된다. 다만 바닷바람이 매섭다. 장갑과 핫팩은 필수다. 굳이 새벽에 오지 않아도 된다. 밤 풍경도 운치가 남다르다. 조명이 켜지면 정자가 몽환적인 분위기로 바뀐다. 일몰부터 밤 11시까지 점등하니 저녁을 먹고 산책 삼아 들르기에 제격이다.
설악산 케이블카, 땀 흘리지 않고 만나는 설경 겨울 설악산 등반은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미끄럽고 추워서다. 하지만 눈 덮인 설악산은 보고 싶다. 이때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된다. 5분이면 해발 700m 권금성까지 올라간다. 케이블카 안은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어 오르는 동안 설악산 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울산바위가 눈앞에 다가오는 순간,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10분 정도 계단을 오르면 권금성 전망대가 나온다. 여기서 보는 설경이 장관이다. 하얗게 눈 덮인 봉우리들 너머로 저 멀리 동해 바다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다만 정상에는 편의시설이 없으니 따뜻한 음료는 미리 챙기는 게 현명하다. 내려와 탑승장 근처 매점에서 파는 어묵과 호떡으로 몸을 녹이는 것도 겨울 케이블카의 즐거움이다.
상도문돌담마을에서 본 설악산 설경.
상도문돌담마을, 설악산을 배경으로 한 골목 산책 설악산의 웅장함에 압도됐다면 이제 그 품속에 안긴 소박한 마을로 시선을 돌릴 차례다. 설악산 초입에 이런 마을이 숨어 있을 줄 몰랐다. 상도문돌담마을은 500년 역사를 지녔지만, 기와집이 즐비한 전통마을은 아니다. 1960~1970년대 지어진 단층 가옥들이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옹기종기 모여 있고, 그 사이를 돌담이 미로처럼 연결한다. 제주 올레길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좁은 골목을 걷다가 고개를 들면 설악산이 바로 거기 서 있다. 겨울이면 눈 덮인 산이 마을 뒤로 병풍처럼 펼쳐진다. 골목 사이로 고양이들이 돌아다니고, 어디선가 커피 향이 풍겨 온다. 한옥카페 ‘도문커피’는 이 마을에 왔다면 꼭 들러볼 만하다. 마루, 반지하, 다락방까지 한옥 구조를 그대로 살린 공간이다. 통유리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겨울에도 온기가 가득하다. 좀 더 특별한 경험을 원한다면 ‘오씨브루잉커피’를 추천한다. 100% 예약제로 소수만 받는, 커피에 진심인 곳이다.
상도문돌담마을 ‘도문커피’에서 판매하는 커피와 아이스크림.
아바이마을, 갯배 타고 건너는 실향민의 터전 아바이마을은 6·25전쟁 때 함경도에서 내려온 실향민들이 일군 곳이다. ‘아바이’는 함경도 말로 ‘아버지’라는 뜻이다. 고향이 보이는 이곳에서 돌아갈 날만 기다렸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좁은 골목마다 스며 있다. 무거운 역사를 품고 있지만 막상 와서 보면 그냥 정겨운 동네다. 이 마을에 가려면 갯배를 타야 한다. 동력 없이 사람이 직접 와이어를 끌어 움직이는 배다. 100m를 건너는 데 5분쯤 걸린다. 드라마 ‘가을동화’와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에 등장했던 바로 그 배다. 직접 줄을 당겨 볼 수도 있는데, 생각보다 힘들다.
마을 안에는 함경도식 음식을 파는 오래된 식당들이 줄지어 있다. 오징어순대와 명태회냉면이 대표 메뉴다. 관광지 특유의 번잡함과 상업적인 분위기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지만, 묵묵히 제맛을 지켜 온 노포들은 그 우려를 기우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겨울 속초에서 꼭 먹어야 할 것들 겨울여행은 결국 먹는 것이 절반이다. 속초는 실향민 음식과 바다 음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도시다. 뜨끈한 것, 시원한 것, 달달한 것이 모두 갖춰져 있다. 아바이순대는 돼지 창자 대신 오징어에 속을 채워 찐다. 쫄깃한 식감이 일반 순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순대국밥 한 그릇이면 추위가 싹 가신다. 아바이마을의 ‘단천식당’과 ‘신다신’이 오래된 맛집이다. 함흥냉면은 홍어 대신 명태포를 무쳐 만든다. 쫄깃한 감자 전분면에 새콤매콤한 양념이 어우러진다. 따뜻한 온돌방에서 먹는 겨울 냉면도 별미다. ‘함흥냉면옥’은 1951년부터 영업해 온 노포다.
닭강정은 속초관광수산시장의 명물이다. 바싹 튀긴 닭에 매콤달콤한 양념을 버무린다. 식어도 맛있고, 오히려 차갑게 먹어야 제맛이라는 사람도 있다. ‘만석닭강정’과 ‘중앙닭강정’이 양대 산맥이니 취향껏 고르면 된다. 속초식 물회를 경험하려면 ‘봉포머구리집’과 ‘청초수물회’ 중 하나를 선택해 방문해 보자. 최근 인기를 끄는 이색 음식 홍게샌드위치는 어떨까. ‘속초751’의 시그니처 메뉴로 빵 사이에 홍게살이 가득 들어 있는 게 특징이다. 워낙 찾는 사람이 많아 조기에 재료가 소진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참고할 것.
아바이마을을 오가는 갯배.
속초의 명물 아바이순대.
‘함흥냉면옥’의 대표 메뉴인 함흥냉면.
속초관광수산시장의 인기 상품 홍게샌드위치.
‘몽트비어’의 수제맥주.
설악산 기슭의 수제맥주 브루어리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면 속초의 밤을 더 깊게 만들어 줄 한 잔이 간절해진다. 설악산의 맑은 물로 빚은 수제맥주라면 더할 나위 없다. 설악산 기슭 척산온천 부근에 수제맥주 브루어리 두 곳이 여행객을 맞이한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문을 열었고 거리도 멀지 않다. 스타일이 달라 골라 먹는 묘미가 있다.
‘크래프트루트’는 양조장과 펍이 한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갓 만든 맥주를 바로 마실 수 있다. IPA, 필스너, 바이젠 등 종류도 다양하다. 캔맥주에 속초 풍경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어 선물용으로도 제격이다.
‘몽트비어’는 홈브루잉 동호회 멤버들이 의기투합해 만든 곳이다.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돼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지역 농산물로 빚은 맥주가 주력이며 맥주 효모로 숙성한 ‘몽트 갈릭피자’가 별미다.
‘흰다정’에서 맛볼 수 있는 빙수.
‘설악젤라또’에서 파는 젤라또.
추워도 아이스크림은 먹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겨울에도 차가운 디저트를 찾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속초에도 그런 이들을 위한 곳이 자리한다. ‘흰다정’은 ‘게릴라빙수’로 유명한 카페다. 언제·어떤 빙수가 나올지, 얼마나 팔지 알 수 없다. 놓치면 다음에 또 언제 먹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크림브륄레빙수·흑임자빙수 등 비주얼도, 맛도 훌륭하다. 메뉴는 인스타그램 계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악젤라또’는 강원도 재료로 만드는 ‘젤라또 전문점’이다. 횡성 유기농 우유, 양양 무농약 쑥, 평창 라벤더 등 지역 식재료를 활용해 특색 넘치는 맛을 자랑한다. 이것저것 골라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작은 도시여서 더 좋다 속초는 하루면 충분한 도시다. 그런데 이상하게 또 가고 싶어진다. 아마 ‘딱 좋은 크기’여서 그런 것 같다.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다. 볼 것은 다 갖췄는데 지치지 않을 정도다. 1일 해돋이를 놓쳤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이번 주말 영금정 해돋이도 충분히 아름답다. 케이블카를 이용해 설경을 보고, 아바이마을에서 갯배를 타고, 순대국으로 속을 채우고, 닭강정 한 박스를 들고 숙소로 돌아가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