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가 숨을 쉰다

입력 2025. 12. 30   16:16
업데이트 2025. 12. 30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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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 라이브 온 스테이지 ‘라이프 오브 파이’

실제처럼 몰아치는 폭풍 객석까지 밀려드는 파도 영상과 조명으로 생명력 얻은 무대
골격 드러난 동물의 몸 배우 호흡과 어우러져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로 구현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사진=에스앤코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사진=에스앤코


무대가 후욱후욱 숨을 쉰다. 비유가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미 세계가 먼저 건너간 작품이다. 소설로 읽혔고, 영화로 소비됐고, 이제는 무대에서 또 다른 생명으로 태어났다. 태평양 한가운데 구명보트에 남겨진 소년 파이와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의 227일간의 동거. 소설과 영화를 통해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이 무대는 관객을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만 보게 두지 않는다. 병원과 동물원, 바다와 밤하늘을 쉼 없이 오가며 관객을 붙잡아 둔다. 폭풍은 실제처럼 몰아치고, 파도는 객석 가장자리까지 밀려온다. 관객들은 관람을 넘어 무대와 함께 생존하게 된다.

제작진은 이 공연을 ‘라이브 온 스테이지’라고 불러 달라고 했다. 넘버 한 곡 안 나오니 당연히 뮤지컬은 아니고, 굳이 넣자면 연극의 범주일 텐데 왜 굳이 이런 낯선 장르를 표방하고 있을까.

1층을 포기하고 2층 앞쪽에서 무대를 내려다봤다. 일명 파노라마석이라고 불리는 특석이다. 먼저 본 지인이 이 자리를 추천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무대 바닥의 움직임까지 볼 수 있다. 과연 추천한 이에게 국밥 한 그릇 사 주고 싶어졌다. 이 작품에서 무대는 배경이 아니다. 바닥은 파도가 되고, 난파선이 되고, 기억처럼 갈라진다. 영상과 조명, 음향이 동시에 움직이며 무대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그렇다. ‘라이브 온 스테이지’는 공연의 일회성만이 아니라 무대 자체가 살아 있다(라이브)는 것을 의미했다.

무대 위에는 배와 침대 몇 개뿐이지만 빈 곳은 곧 병원이 되고 바다가 된다. 영상은 설명하지 않고 암시를 남긴다. 감정은 왕왕 조명이 드러낸다. 라이온킹 부럽지 않은 퍼펫의 움직임은 입을 틀어막게 만든다.

골격이 드러난 동물의 몸은 사실적 재현보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배우의 호흡과 버무려져 완벽한 생명체로 존재한다. 특히 벵골호랑이 리처드 파커를 움직이는 퍼펫티어들의 합은 인상적이다. 세 사람이 나눠 맡은 머리와 몸통, 꼬리는 분리돼 보이지 않는다. 생동과 긴장이 객석에 정확히 전달된다.

박강현이 연기한 파이는 장난꾸러기 같고 천진난만하다. 이 얼굴은 낯설지 않다. 그는 이미 몇몇의 전작 캐릭터에서 비슷한 에너지를 보여 줬다. ‘노래하지 않는 박강현’은 조금 낯설다 싶었지만 금방 파이의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난파선의 유일한 생존자 파이는 병실을 찾아온 2명의 보험사 직원에게 자신이 바다에서 겪은 2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물이 등장하는 이야기와 인간만 남은 이야기다. 표면적으로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하나는 우화 같고, 하나는 차갑고 끔찍하다.

그러나 구조를 따라가다 보면 많은 부분이 겹친다. 가장 먼저 희생되는 약자는 얼룩말로 옮겨지고, 보호자였던 존재는 오랑우탄이 된다.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인간은 하이에나로 변주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리처드 파커가 있다.

이 호랑이는 단순한 맹수가 아니다. 인간 버전에서 파이가 감당해야 할 폭력성과 공격성,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야만’을 대신 떠안은 존재처럼 보인다. 채식주의자였던 소년이 끝내 피를 입가에 묻혀야 했던 순간, 그 선택의 무게는 호랑이의 본능으로 이동한다. 파이는 자신의 안에 있던 생존 본능을 떼어내 리처드 파커라는 형상으로 세운다. 마치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둘로 나눈 것처럼.

흥미로운 건 이 호랑이가 위협으로만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리처드 파커는 파이를 끊임없이 긴장하게 하고, 살아 있게 만든다. 공포는 파이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일으켜 세운다. 혼자였다면 파이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공포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생존을 부추기는 힘이다. 호랑이는 적이자 동반자이며, 파이가 하루를 더 버티게 만드는 존재다.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사진=에스앤코
뮤지컬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한 장면. 사진=에스앤코



조연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는 작품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축이다. 서현철이 연기한 아버지와 송인성의 어머니는 극을 든든하게 지지한다. 이 작품에는 뚜렷한 악역이 없다. 자칫하면 이야기가 산으로 갈 수 있다. 가뜩이나 바다 한가운데 배가 떠 있는 작품이다.

이상아가 연기한 라니는 파이의 누나 역이다. 원작에는 누나가 아닌 형 라비가 나온다. 이상아는 노래 톤과 표정, 연기를 고르게 신뢰할 수 있는 배우다. 묘하게 그가 등장할 때마다 무대의 공기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라니는 은근히 자주 등장한다.

냉정한 일본인 보험사 직원이 결국 동물 버전의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장면은 이 작품의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들이 순진해 동물 이야기를 믿은 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너무 잘 알기에 덜 잔혹한 이야기를 고른 것일 뿐이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이야기보다 동물이 동물을 잡아먹는 이야기가 처리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 순간 관객 역시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어느 쪽이 사실인가가 아니라 어떤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마지막에 리처드 파커는 아무 말 없이 사라진다. 파이는 붙잡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호랑이는 극복된 상처가 아니라 끝내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설명되지 않은 채 남은 공백이기에 오히려 기억에 오래 남는다.

‘라이프 오브 파이’는 답을 주지 않는 작품이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진실을 알고도 다른 이야기를 선택하는 인간은 비겁한가. 아니면 오히려 인간적인가. 무대 위에서 사라진 호랑이는 결국 우리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어떤 진실의 또 다른 얼굴이었을지 모른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부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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