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합정동 절두산 외국인 선교사 묘역
강변 봉우리 누에머리 닮아 잠두봉
천주교 신자 처형하며 절두봉으로
영국과 통상조약 후 외국인 묘지 조성
아펜젤러 등 14개국 415명 묻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대교 옆 한강변은 양화진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황포돛대를 단 나룻배들이 건너편 파릉(양천)을 오갔다. 버드나무들이 도열했던 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누에머리를 닮았다’ 해서 잠두봉으로 부르다가 절두산이라는 섬뜩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머리를 자른 산’이란 지명이 암시하듯 19세기 후반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비극의 현장이다. 경승지인 이 공간이 참형지로 바뀐 이유는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전함이 강화 해역에서 중국인의 안내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양화진에 정박했던 데 있다. 대원군은 한강 수로를 신도들이 알려줬다고 오해해 무려 2000명의 신자에게 칼을 내렸다.
1883년 영국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순교성지인 이 절두산 위에 외국인 묘지가 조성돼 오늘에 이른다. 이 땅의 개화기를 지켜본 14개국 415명의 외국인이 묻혀 있다.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1872~1909),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 미국인 사업가 겸 언론인 앨버트 테일러(1875~1948) 등이다. 이들이 남긴 족적은 실로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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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1858~1902)는 1885년 조선에 와 선교와 교육사업에 힘썼다. 들어오자마자 학교부터 세웠다. 정동 배재학당이었다. 한 달 전에 먼저 입국한 의사 윌리엄 스크랜튼의 두 칸짜리 집을 사서 교실로 개조해 8월 3일부터 영어 수업을 열었다. 입학생은 두 명이었다. 학교 이름 ‘배재학당’은 ‘인재를 기르는 집’이란 의미로 1887년 2월 21일 고종이 직접 내렸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11일 성서번역자 회의에 참석하러 목포로 가다 어청도 부근에서 선박 충돌 사고로 숨졌다(『배재학당총동창회』).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언더우드(1859~1916)도 아펜젤러와 같은 날 입국해 1886년 언더우드 학당(경신학교 전신)을 세웠다. 이 학교는 1915년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 전신)로 바뀌었다. 1887년 정동교회(현 새문안교회)를 건립해 장로교를 전파했다. 입국 전 일본에서 한국어를 배워 조선어문법책을 영어로 번역해 후임자들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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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델은 영국인 기자로 1902년 러일전쟁 취재차 한국에 와 1904년 7월 18일 독립운동가의 지원으로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데일리 코리안뉴스를 창간했다. 격동기 대한제국의 실상과 일제의 침략상을 널리 알렸다. 그는 당시 영국이 일본과 동맹국 관계였음에 힘입어 자유로운 신분이었으나 경술국치의 날에 장지연의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언론활동을 접어야 했다. 1909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 눈을 감기 직전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시신은 이곳 선교사묘원에 안장됐다. 장지연이 묘비 뒷면에 비문을 썼으나 못마땅하게 여긴 일제가 지워버려 지금은 공백으로 남아 있다. 1995년 영국대사관은 베델을 기리는 ‘베델 언론인 장학금’을 제정했다. 그는 여전히 이 땅에 살아 있다.
헐버트는 한국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 인물이다.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의 헌사에서 ‘잠자는 한국민의 민족정신이 깨어나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는 그의 유언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의 한국 사랑은 커서 ‘아리랑’을 최초로 바깥에 알리기도 했다. 고종의 외무 특사를 지내던 1896년 한국학 연구지인 『The Korea Repository』의 2월호 ‘Korean Vocal Music’ 논문에서 “아리랑은 한국인에게 쌀과 같은 존재다. 어딜 가더라도 들을 수 있다. 이 노래는 즉흥곡의 명수인 한국인이 끝없이 가사를 바꿔 부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후렴구는 바꾸지 않았다”고 썼다. 헐버트는 서양 악보에 아리랑 가사를 채록해 알파벳으로 남겼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란 노랫말이었다. 아리랑 역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 ‘헐버트의 기록 덕에 우리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궤도 위에 올랐다’는 평가를 듣는다. ‘본조 아리랑’ ‘별조 아리랑’ 등 여러 아리랑의 산실로 역할을 한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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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종로구 행촌동에 지금도 남아 있는 저택 ‘딜쿠샤’의 주인으로 유명하다. 광산사업가면서 미국 AP통신의 통신원도 맡아 했다. 1919년 3·1 만세사건을 최초로 바깥에 알린 언론인이다. 미·일 간 전쟁이 임박하자 미국으로 추방돼 로스앤젤레스에서 숨졌으나 유언에 따라 아버지가 묻힌 이곳 선교사 묘역에 나란히 안장됐다. 부인 메리 린리 테일러가 쓴 조선에서의 경험담을 아들 브루스 티켈 테일러가 1992년 『호박 목걸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외국인 선교사 묘역은 한국 개신교의 성소이기도 하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스크랜튼 등이 잠들어 있다. 갑신정변 직후인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에 내린 언더우드는 한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목사다. 독신이었던 언더우드와 달리 아펜젤러 부부는 입국하지 못하고 제물포항에서 도로 나가사키로 되돌아갔다가 7월에 서울에 들어온다. 최초의 여성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1832~1909)은 6월 입경에 성공했다. 스크랜튼은 이화학당을 설립해 많은 동량을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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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홀(1860~1894)과 부인 로제타, 그리고 엘리 바 랜디스(1865~1898) 등은 의료 선교사들로서 평양과 제물포 등지에서 의료봉사를 했다. 의학 과정을 둬 의사를 양성하고, 진단과 치료, 예방과 관리를 담당하는 의료 시스템을 한국에 처음으로 구축한 선구자들이었다. 로제타 홀은 이화여대에서 최초로 의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아들 셔우드 홀(1893~1991)은 1928년 황해도 해주에 한국 최초의 폐결핵 요양소를 개설하고, 1932년에는 크리스마스실을 도입해 결핵 퇴치에 공헌했다. 며느리 마리안과 딸 에디스 등 일가족이 모두 의료 서비스를 펼치고선 양화진에 묻혔다.
구보는 윌리엄이 의료 봉사에 나서면서 “자기보다 작은 조랑말을 타는 게 미안해 함께 걸어다녔다(『윌리엄 제임스 홀의 생애』)”란 일화에서 깊은 감동을 받는다. 그는 봉사활동을 펴다 과로에 이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사망했다. 구보는 모든 것이 불편했을 19세기 말 선진국이던 모국을 떠나 먼 이역에서 기꺼이 봉사활동을 펴고 이 땅에 묻혔던 외국인들에게서 깊은 신앙심과 뜨거운 인류애를 함께 확인한다. 시공을 아우르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존중과 믿음 없이는 해내기 어려웠을 일이라 여긴다. 사진=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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