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옛 그림 속 숨은 이야기 ⑬ 조선 수군의 함성을 듣다 ‘수군조련도병’
정조 때 편찬된 병법서 ‘병학통’ 따라
삼도 수군 합조 통제영 훈련 모습 담아
화폭 위 수십 척의 판옥선·거북선
가운데 가장 크게 그려진 배 위에는
통제사 가리키는 ‘삼도대원수’ 깃발
명나라 신종 전공 치하하며 하사한
이순신 상징 ‘팔사품’ 중앙 누각에…
역사는 교지(敎旨) 한 장으로 시작됐다. “보인(保人) 이순신(1545~1598) 무과(武科) 병과(丙科) 제4인 급제출신자(及第出身者) 만력 4년(1576년, 선조 9년).”
서른두 살의 나이, 종9품으로 함경도에서 시작한 관직 생활은 전국의 험지를 넘나들었다. 충청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奉事·종8품)부터 전남 고흥의 발포수군만호(종4품)까지 거쳤다. 능력은 인정받았지만 올곧은 성품과 언사는 줄곧 상사의 눈 밖에 났다. 1583년 남들이 가기 꺼리는 험지 함경북도 건원보에서 여진족 울지내를 사로잡고, 두만강 하류의 섬 녹둔도에서 오랑캐를 무찔렀다. 승리했지만 급습을 당한 터라 피해가 컸다. 더군다나 상사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징계를 받아 백의종군의 치욕도 감수해야 했다. 조선 영토의 땅끝에서 바다 끝까지 편안한 관직은 이순신의 자리와 거리가 멀었다. 심지어 1590년 만포진첨사(종3품)로 임명됐다가 취소되고, 다음 해 가리포첨사(종3품)로 임명됐다가 취소되는 일이 반복됐다.
1591년 류성룡(1542~1607)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보냈던 통신사의 보고를 듣고 전쟁의 기운이 짙어진다는 것을 예감했다. 류성룡의 천거로 그해 2월 정읍현감(종6품)이던 이순신을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종3품)로 임명했다. 당시 신하들은 이순신에게 종3품의 품계를 한 번에 줄 수 없다며 논쟁을 벌였고, 선조는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지금은 평상시의 규정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런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선조실록』 권25, 선조 24년(1591) 2월 16일 계미(癸未) 중.
전라좌수사는 본영이 여수이고, 다섯 개의 관아(순천· 낙안·보성·광양·흥양)와 5개의 포(浦)(방답·여도·사도·발포·녹도)를 관할하는 자리였다. 이순신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자신의 관할 구역을 순시하며 무기와 장비를 확인했다. 16세기 초반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이미 개발된 판옥선과 화약을 시험하고, 1592년 4월 12일 거북선에서 화약 시험을 마쳤다. 그리고 운명처럼 그다음 날 임진왜란은 부산진에서 시작됐다. 조선은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왜군의 기세를 막지 못했다.
다행히 바다에서 거북선과 판옥선이 활약했다. 육지에서 너무 무거워 기동성이 없었던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황자(黃字) 총통은 함선에서 대형화포의 화력을 다했다. 가장 큰 천자총통의 사거리를 현재의 단위로 환산하면 대략 1123m라고 한다. 돌격하는 거북선에 실린 화포가 왜군에게는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왜군은 부산포해전의 패배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당분간 조선 수군과 싸우지 말라고 명령했을 정도였다. 이순신은 처음 출전한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까지 승기를 거머쥐었다. 전쟁 중 조·명 연합군의 임무에 맞춰 이순신은 처음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임명됐고, 경상·전라·충청의 선단을 진법에 맞춰 효율적으로 통제 운영했다.
이처럼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은 수군체제의 변화를 가져온다. 왜구와 같은 해적에 대항하기 위한 도(道) 단위 책임 체제에서 통제영으로 선단을 운용하는 기동항해전술로 전환하게 된다.
‘수군조련도병’은 변화된 체제를 담은 병법을 한눈에 보기 쉽게 도해했다. 각 도의 수군절도사인 수사(水使) 단위로 연습하는 수조(水操)와는 다르게 통제영 훈련은 합조(合操)라고 해 연합훈련을 하는 것이다. 통제사가 지휘하는 합조는 전쟁이 끝난 후 선조 37년(1604)부터 체계적으로 진행됐다.
그림에는 돛을 단 수십 척의 판옥선과 거북선이 도열하고 있다. 군인의 의장과 깃발은 황색, 흑색, 백색, 파란색, 빨간색으로 구분했다. 병풍의 가운데 크게 그린 좌선(坐船)에는 통제사를 가리키는 ‘삼도대원수(三道大元帥)’ 깃발이 걸렸다. 판옥선 위에 누각이 설치됐다. 하지만 통제사는 보이지 않고, 통제사를 상징하는 팔사품(八賜品)이 있다. 팔사품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신종이 이순신의 전공을 보고 이순신에게 하사한 의례적 선물이다. 네모난 함에 있는 도독인(都督印)을 담은 함과 호두령패(虎頭令牌), 귀도(鬼刀)와 참도(斬刀) 등 각종 의장물이 그려져 있다. 팔사품은 이후 후대 통제사에게도 계승돼 조선 말까지 통제사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수군조련도’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지만 그림에 보이는 각 군선은 저마다 군기(軍旗)를 걸고 있고, 그 군기에는 선단 위치와 소속 읍진(邑鎭)이 명기돼 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삼남 수군의 편제를 파악할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경상우수사를 겸직하고 있는 삼도수군통제사가 중영(中營), 전라좌수영이 전영(前營), 경상우수영이 좌영(左營), 전라우수영이 우영(右營), 충청수영이 후영(後營)을 이룬다. 그리고 각 영 아래에 오사(五司)를 두고, 다시 그 밑으로 오초관(五哨官)을 두는 형식으로 구성됐다.
이러한 부분에서 ‘수군조련도’는 『병학통(兵學通)』에 실린 ‘삼도주사첩진도’를 따랐다고 한다. 『병학통』은 정조가 즉위하던 해, 1776년 정조의 명으로 형조판서와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지낸 장지항(1721~1778)이 편찬했다. 이전까지 통일되지 않았던 병법을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적용하는 군사 훈련 기본서를 만들었다. 1776년 9월에는 각 군영의 훈련, 남한산성의 훈련, 통영수군의 훈련에 『병학통(兵學通)』을 따르라는 명이 내려졌다.
정조는 당시 의례와 규범 등을 정리하고 집성해 도설(圖說)과 회화로 많이 남겼다. 이러한 용도의 그림을 곁에 두며 본인은 물론 신하들이 중요한 사항을 늘 숙지하고 있기를 바랐다. 정조 시기 이러한 문화적 배경은 이후 교육과 지휘를 위해 조정이나 지역별로 통제영의 합조를 그리는 일이 많았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순신이 남긴 역사적 유산을 200년 후 정조가 수용해 시대에 알맞게 계승한 것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해 교지를 받던 날, 함경도에서 여진족과 싸우던 날, 자신이 수백 년 동안 존경받는 인물임을 알았을까? 한 해를 돌아보며 지금 험지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있을 또 다른 이순신을 응원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전 ‘우리들의 이순신’을 내년 3월 3일까지 진행한다. 이 글은 전시의 기록물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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