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역사 - 넥타이
‘30년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 병사
연인의 스카프 목에 두르며 시작
루이 14세가 ‘크라바트’로 유행
긴 타이 늘어뜨린 띠 형식과 함께
19세기 ‘나비넥타이·애스콧’ 등장
여러 매듭법 거치며 변형 거듭
‘중요한 회의 = 넥타이를 맨다’
정장 차림 더 단정하게 보이고
색·패턴 따라 의향 어필하기도
이른 아침 지하철역 전동차 문이 열리고 회색 코트, 검은 패딩, 남색 재킷이 어깨를 스친다. 그 사이에서 폭이 7㎝쯤 돼 보이는 넥타이가 한 줄씩 흔들린다. 남색 스트라이프도 보이고, 매듭이 큰 회색 넥타이도 보인다. 같은 셔츠, 같은 바지여도 넥타이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오늘 중요한 일정이 있다”는 신호다.
넥타이는 기능이 많지 않다. 오히려 불편한 부분도 있다. 목을 따뜻하게 하려면 머플러를 둘러야 한다. 셔츠 앞을 여미자면 단추가 필요하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 불편한 넥타이를 선호한다. 이 천 조각은 언제, 어디서, 왜 우리 목으로 들어왔을까?
막연한 관점으로, 로마제국 군대에서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기원후 2세기 무렵 로마 병사가 갑옷으로 인한 목 쓸림과 바람을 막으려고 목수건을 둘렀다는 설명이다. 라틴어로 ‘포칼레(FOCALE)’라고 부르는 목천을 로마 미술에서 찾을 수 있다. 트라야누스 원주, 세베루스 개선문 부조들을 보면 목을 감싼 군인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넥타이의 ‘조상’을 여기서 찾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를 직접적 시조로 단정하긴 어렵다. ‘목을 감싼 천’이 긴 역사에서 여러 번 나타났기 때문이다.
현대 넥타이와 같은 모습을 한 천 조각의 직접적 기원은 30년 전쟁(1618~1648)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 프랑스 왕실 경호를 돕던 크로아티아 용병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병사들은 고향에서 무사귀환을 기원하며 연인이나 아내로부터 받은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있었다. 어린 루이 14세가 이를 가리키며 “저건 무엇이냐?”고 물었다. 시종장이 병사의 출신을 묻는 것으로 착각해 “크라바트(cravate)”라고 답했다. 크라바트는 ‘크로아티아인’이란 뜻이다. 화려한 치장을 좋아하던 루이 14세에게는 이 스카프가 ‘멋진 새로운 장식’으로 비쳤고, 1646경부터 크라바트를 두르고 다니자 이런 스타일이 그 시대 유행하게 됐다.
초기 크라바트는 장식성이 강했다. 귀족은 레이스가 달린 얇은 천을 목에 둘렀고, 여기에 핀과 브로치 등을 꽂아 보석을 올렸다. 목 한가운데는 시선이 모이는 자리로, 곧 지위를 과시하는 부분이었다. 색과 무늬가 소속을 드러내는 방식도 겸했다. 전장에선 표지가 필요했고, 궁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사이 크라바트는 더 빠르게 변모한다. 1692년 스틴케르케 전투 뒤에는 ‘스테인커크(Steinkirk)’라는 크라바트가 유행했다. 급히 출전하느라 매듭을 느슨하게 하고, 끝을 단춧구멍에 찔러 넣는 방식이다. 1770년대 영국에선 레이스 가장자리를 두른 큰 리본 크라바트가 등장한다. 목 앞 리본이 커질수록 과시적인 취향도 강해졌다.
19세기 초 ‘보 브러멀(멋진 브러멀)’로 불린 영국 댄디즘의 창시자 조지 바이런 브러멀(1778~1840)은 전처럼 과장된 장식 대신 하얀 리넨 크라바트를 빳빳하게 풀 먹여 매는 스타일을 즐겼다. 아침마다 여러 장을 갈아 매며 주름 하나 안 생기게 검열했고, 바야흐로 단정한 매듭이 취향을 판정하는 시대가 열렸다. 이쯤부터 ‘스카프 같은 목수건’이 ‘띠 같은 목장식’으로 확실히 변천한다. 매듭이 작아지고, 천 폭이 줄어든다. 목에서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부분이 눈에 띄게 줄었다.
19세기 후반 영국은 2가지 넥타이 스타일을 보인다. 큰 천을 없애고 매듭만 남긴 ‘나비넥타이(bow tie)’와 경마 복장에서 유래한 ‘애스콧(Ascot)’이다. 애스콧은 크라바트 형식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되 자유분방한 분위기를 대폭 강화해 1880년대 중산층 이상 남자의 주간 정장으로 유행했다.
같은 시기 ‘띠 모양 넥타이’가 역사 속에 등장한다. 1890년 전후로 ‘더비 타이(Derby tie)’와 ‘포인핸드 매듭(four-in-hand knot)’이 언급된다. 긴 타이를 늘어뜨리고, 한 번 매듭으로 정리하는 형태다. 포인핸드는 런던 ‘포-인-핸드’ 클럽 같은 이름과 연결해 설명하는 경우가 많다. 마차를 끄는 4마리 말을 뜻하는 것이 매듭 이름으로 변화했다는 해석이다. 오늘날 넥타이 형태가 이때쯤 갖춰졌던 셈이다.
이 시기 넥타이는 남성 중심의 넥웨어만으로 머물지 않고 빅토리아 시대 복식개혁, 이른바 ‘합리적 복장’의 흐름을 타고 여성의 활동성을 제약하는 코르셋과 무거운 치마는 사라지고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여성을 중심으로도 유행했다. 즉 넥타이가 남녀 평등을 상징하는 아이템으로 소비됐다.
프랑스에서는 ‘라발리에르(lavalli re)’ 같은 리본 넥웨어가 19세기에 유행한다. 커다란 매듭과 늘어진 끈이 특징이다. 예술가, 학생, 지식인 같은 집단이 즐겨 썼다. 목장식은 작은 변화로 보이지만, 사교모임처럼 품위 있는 공간과 연관돼 있음을 상징했다.
새로운 스타일이 많이 시도됐음에도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는 크라바트 계열이 남성 정장 넥웨어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전쟁은 옷을 단순하게 만들고 생활방식을 바꿨다. 전쟁 뒤 기성복이 주류가 되자 셔츠와 재킷은 표준규격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우리 목에서 ‘복잡한 매듭법’이 사라지고 ‘간편한 매듭법’이 자리 잡았다.
1924년 미국 재단사 제시 랭스도르프가 사선 재단(bias cut)과 3조각 봉제를 특허로 정리했다. 주름을 줄이고, 늘어짐은 잡는 방식이다. 정확히 지금 흔히 보이는 넥타이 구조가 여기서 등장한다.
패셔니스타 에드워드 8세(윈저공)는 두꺼운 타이로 ‘포인핸드 노트’에 가까운 매듭을 크게 보이게 연출했고, 대중은 그 실루엣에 ‘윈저’라는 이름을 붙였다. 국왕이 넥타이를 자기 이미지로 고정한 사례다.
사무직 사이에서의 유행은 넥타이를 더 깊은 인상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변화시켰다. 사무직은 얼굴과 몸통을 더 자주 노출한다. 회의실에선 말과 표정, 넥타이가 그 공간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공식석상이나 뜻깊은 자리에서는 필수품으로 여겨지며 은행, 항공사, 호텔, 학교 등이 넥타이를 유니폼에 포함시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학교 넥타이는 ‘집단 소속’을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영국에서는 1880년 옥스퍼드 엑서터 칼리지의 조정클럽이 모자 리본을 풀어 타이처럼 묶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다. 색띠는 곧 클럽 타이, 스쿨 타이로 번져 나간다. 전쟁터가 아니어도 넥웨어의 색은 부대 마크처럼 작동했다.
여기까지 오면 ‘타이’라는 분류가 확고해진다. 넥타이는 나비넥타이, 애스콧, 스카프 타이 같은 변형이 계속 나왔다. 그래도 출근길에 가장 많이 보이는 형태는 긴 넥타이다. 매듭 하나로 끝나고, 재킷 앞선을 길게 따라 내려간다.
중요한 자리에서 넥타이를 선호하는 데는 크게 3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셔츠와 재킷이 정돈돼 보인다. 둘째, 말투가 정리된다. 목을 한 번 조이면 자연스럽게 긴장한 우리 목이 이상적인 발음과 말투, 말하는 속도를 조절하기 용이해진다. 셋째, 한 줄 천으로 취향이나 의향을 드러낸다. 남색 솔리드, 레지멘털 스트라이프, 작은 도트는 전혀 다른 신호를 상대에게 보낸다. 국제행사에서 지도자들이 의전과 외교상황에 따라 넥타이 색을 갖추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넥타이는 사람을 ‘중요한 자리’로 옮겨 놓는다. 경건한 마음으로 그 매듭을 반듯하게 조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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