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 그들이 온다 - 일회용 스파이 전성시대
외교관 위장 러 스파이 700명 이상
우크라 침공 이후 유럽 각국서 추방
요원 보충 위해 현지인 모집해 이용
법·정치적 부담 없이 임무 따라 보수
단순·위험·철수 불가능한 공작 투입
나라마다 국민 대상 ‘방첩교육’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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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위협하는 러시아 일회용 스파이
지난 7일 우크라이나 국영 통신사인 ‘우크린포름’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각국 정보기관들이 외교관 신분으로 위장해 활동하던 러시아 정보요원 700여 명을 추방했다면서 러시아 정보기관이 이를 보충하고자 일회용(one-time·single use) 스파이를 대규모로 활용 중이라고 보도했다.
인용된 우크라이나 해외 정보기관 통계에 따르면 전쟁 발발 후 각국에서 추방된 러시아 외교관들은 불가리아 82명, 독일 65명, 폴란드 58명, 루마니아 52명, 슬로바키아 39명, 네덜란드 34명, 슬로베니아 34명 등이라고 한다. 이를 만회하고자 러시아는 민간인 일회용 스파이를 더 많이 활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했다. 유럽 국가에서 이들을 이용한 러시아 스파이 사건이 밝혀진 것만 폴란드 47건, 에스토니아 20건, 라트비아 19건, 독일 12건, 영국 10건 등이다. 이들 사건과 관련돼 체포된 민간인은 유럽 12개국 출신 130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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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폴란드 검찰은 이달 초 러시아 국적의 미하일 미르고로드스키를 파괴 공작과 스파이 활동의 총책 혐의로 궐석 기소했다. 그는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지시에 따라 러시아에 거주하며 텔레그램 메신저로 유럽 각국에 30여 명의 공작원을 지휘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폴란드 검찰은 이미 2023년 미르고로드스키의 지시에 따라 스파이 활동을 한 우크라이나인 12명과 벨라루스인 3명 등 16명을 체포하기도 했었다. 재판 과정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들은 임무 난이도에 따라 보수를 받았다. 우크라이나를 비방하는 전단을 붙이는 데 5달러, 철도 수송 감시카메라 설치에 400달러, 열차 탈선 공작은 1만 달러 등이었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정보기관들은 러시아 정보기관이 자신들의 개입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전문 정보요원을 투입하지 않고 현지에서 일회용 공작원을 모집해 스파이 활동에 이용한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15일 폴란드에서 발생한 우크라이나로 지원물자를 수송하는 철로 파괴 공작에도 이들이 활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독일에서도 지난해 4월 독일계 러시아인 2명이 러시아의 지시를 받아 정유시설, 미군 기지 및 방산기업 등 중요 군사시설을 염탐하고 파괴를 모의한 혐의로 체포됐다. 영국에서도 지난 3월 불가리아인 3명이 우크라이나 병사들이 훈련받는 독일 내 미군 기지를 감시하고 러시아 비판 언론인 암살모의를 한 혐의로 유죄평결을 받았다. 이들은 휴대전화 221대, 심카드 495개, 드론 11대 등 대규모 장비를 운용하며 러시아 정보기관의 지시를 수행했다.
쉽게 채용하고 꼬리 자르기 편해
‘일회용 스파이(Disposable Spy)’란 정보기관이 특정한 목적을 위해 활용하고 임무 종료 뒤에는 정치적·법적 부담 없이 버릴 수 있는 존재로 취급하는 스파이를 말한다. 즉 필요할 때만 쓰고 임무가 끝나면 더 이상 보호하거나 회수할 필요가 없도록 설계된 공작원이다. 임무 중 위험해지더라도 구조, 지원, 보호 없이 방치되는 게 일반적이다.
비밀리에 중요한 임무를 처리해야 하는 정보기관은 우수한 자원을 선발해 오랫동안 훈련 과정을 거쳐 정예요원을 양성한 뒤 정보활동에 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정식 공작원을 쓰기 어려운 경우 일회용 스파이를 이용하기도 한다. 단순하지만 위험성이 높은 접선, 운반, 현장 감시나 적국 내에서의 테러, 파괴 공작 등의 임무에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암살 등 전문성이 필요하지만 임무 수행 후 철수가 불가능한 상황 등에도 투입된다.
정보기관 입장에서 이들을 활용하는 이유는 자신들과의 연결성을 최소화해 발각돼도 책임을 회피할 수 있고 임무에 실패해도 외교·정치적 타격이 작으며 정식 공작원처럼 긴 훈련 과정 없이 바로 투입할 수 있어서다. 더구나 비정규 민간인은 정규 스파이보다 상대 방첩기관의 추적이 어려워 더욱 은밀하게 임무를 이행할 수도 있다.
주로 활용되는 것은 범죄조직 구성원, 난민이나 망명자 등 사회적 취약계층, 금전적 이유 등으로 약점이 잡힌 사람, 일시적으로 포섭한 현지 협력자, 사상이나 종교적 이유로 쉽게 포섭되는 자발적 협조자 등 말 그대로 ‘언제나 대체 가능한 인력’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식 공작원으로 훈련받지 않았기에 배신하거나 실수하는 등 신뢰성이 부족하고 공작 임무 이후 버려지거나 체포돼 처형되는 등 인권 문제가 발생하기도 해 마냥 편리하게 활용할 순 없다.
그럼에도 정보기관의 정식 공작관이나 공작원이 발각됐을 때의 외교적 파장과 비교하면 훨씬 부담이 작기 때문에 일회용 스파이가 지속적으로 투입되는 것이다. 과거 냉전 시절에는 공산권과 서방의 양대 정보기관이었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각국에서 현지인을 포섭해 활용하다가 임무 수행 후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재도 이란과 러시아 등이 범죄자들을 활용하는 사례가 여전하다. 특히 중국은 각국에서 현지화된 화교나 유학생들을 일회용 스파이로 많이 이용한다.
포섭되지 않도록 국민 경각심 높여야
정보기관의 일회용 스파이 활용이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현지 민간인, 제3국 출신자, 이민자 등을 활용하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또한 단순 첩보 수집뿐만 아니라 사보타주(파괴), 암살 등 하이브리드 공작에 동원되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지난 9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런 유형의 활동을 스파이 업계의 ‘긱 이코노미(Gig Economy)’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우버, 에어비앤비, 배달앱처럼 단기 계약과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며 소득을 얻는 형태의 긱 이코노미가 디지털 플랫폼을 기반으로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점을 감안하면 스파이 활용에 도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더구나 정보기관 입장에선 외부 민간인을 고용해 그로 하여금 필요에 따라 적합한 인물을 현지에서 단기적으로 채용, 개별 임무를 수행토록 하는 전략은 매우 효율적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의 연계를 차단할 수 있어 선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회용 스파이가 늘어날수록 장기간 활용되는 소수의 전통적 공작원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이 정보기관에 이용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관한 정확한 인식도 없이 단순한 돈벌이로 참여했다가 간첩 혐의 등으로 엄중하게 처벌될 위험성에 노출된다.
이는 최근 각국이 자국민을 대상으로 방첩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은 국토안보부와 연방수사국(FBI)이 국민의 방첩 경각심을 일깨우는 캠페인을 상시화하면서 FBI 요원이 학교와 기업을 방문해 직접 교육을 하고 있다. 영국 보안국(MI5)과 호주 보안정보원(ASIO)의 방첩기관장들은 수시로 공개연설을 하는 등 전면에 나서 국민의 방첩 경각심을 높이고 있다. 중국 국가안전부는 공식 위챗 계정을 통해 전 국민 대상 방첩교육을 상시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반인 대상 방첩교육이 거의 없으며, 신고문화도 위축된 상태다. 국내에서 활동 중인 외국 정보기관 요원들이 일회용 스파이 활용을 늘릴 경우 포섭되는 우리 국민의 숫자가 크게 증가할 수도 있다. 외국 정보기관을 위해 단순한 일을 하다가 처벌받지 않도록 국민의 방첩 경각심을 일깨우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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