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초 많이 자라던 고개…지도·약주·천주교 시작되다

입력 2025. 12. 18   15:10
업데이트 2025. 12. 18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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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서울 중구 중림동 ‘약현’

김정호 독학으로 대동여지도 완성
서성이 빚은 ‘약산춘’, 약주 유래돼
조선인 최초 세례자 이승훈 탄생지
우리나라 최초 건립 약현성당 우뚝
손기정의 월계수 아름드리 나무로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의 현재 모습.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의 현재 모습.

 


서울역 뒤 염천교 부근은 마포에서 들어오는 수산물을 거래하던 칠패시장이 있었던 곳이다. ‘칠패’라는 이름은 이 일대가 도성 경비를 맡던 금위영의 7구간이었던 데서 유래했다. 현재 경부선 철로가 놓인 하천은 해물에서 배출된 소금물 때문에 ‘염천(鹽川)’이란 이름을 얻었다. 태종은 이 물길을 늘려 한강까지 이을 생각을 했으나 조선 창건 후 공사 수가 많아 운하 건설을 포기한 바 있다. 염천교 옆 선혜청 자리에 들어섰던 아침 시장 남대문조시(朝市)는 남대문시장으로 이어졌다. 1945년 이후 염천교 부근에는 수제 구두점들이 들어섰다. 서울역이 가죽 구입하기가 용이한 위치여서 제화가들이 모여들어 구두거리를 형성했다.

염천교 서쪽으로는 중림동이 위치한다. 유서 깊은 동네여서 아직도 옛 정취가 남아 있다. 1946년 약전중동과 한림동을 합성해 지었다. 약전중동은 ‘약밭가운뎃말’이라는 뜻이다. 이곳 ‘약밭고개(藥峴)’에서 약초가 많이 자라 그렇게 불렀다(『서울지명사전』). 조선 전기의 문신 성현(1439~1504)이 이곳에서 살았다. 무학대사가 집터를 잡아 줬다. 달빛 아래 시를 낭송하자 손이 와서 자고 있다가 깨어나 신선이 온 줄 여겼다는 일화(『동국여지비고』)가 전해질 정도로 야경이 뛰어났었다. 고개 위여서 성안의 불빛을 부감으로 볼 수 있었던 까닭이 아닌가 구보는 여긴다. 그 자리에는 1905년 양정고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손기정체육공원으로 바뀌었다. 양정고 출신 마라토너 손기정(1912~2002)이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해 아돌프 히틀러에게서 상으로 받은 지중해산 월계수 묘목이 아름드리 자라나 있다.

약현 초입엔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04~1866 추정)가 이곳에서 살았다는 안내석이 서 있다. 낮은 신분들의 행적을 수록한 유재건의 『이향견문록』에 언급되는 것으로 미뤄 중인 이하의 신분이었던 듯하다. 김정호는 1834년 ‘청구도’에 이어 ‘동여도’를 거쳐 1861년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다. 평안도 편에 일부 미완성 부분이 있어 고종 3년 이후 작업 도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대동지지』). 일본의 대동여지도 격인 ‘이노즈(伊能圖)’는 1821년 이노 다다타카가 나가사키에서 입수한 서양의 작도법을 익혀 17년에 걸쳐 일본 전역을 답사하며 완성한 데 비해(『명치 천황』)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독학으로 만들었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정호는 『지도유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국방상의 요충지를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파악해야 한다. 여행과 왕래에도 필요하다. 난시에나 평화 시에나 지도가 소용된다.”

 

 

서울 중림동에 세워진 고산자 김정호 기념비.
서울 중림동에 세워진 고산자 김정호 기념비.

 

약현성당 언덕의 14처.
약현성당 언덕의 14처.

 

양정고 옛터에 자리 잡은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
양정고 옛터에 자리 잡은 손기정 월계관 기념수.

 


응당 정부가 맡아야 마땅하지만 손 놓고 있던 일을 개인이 나서 이룬 사례란 점에서 구보는 고산자에게 존경의 마음을 표한다. 1996년 경기 수원시가 정조의 화성행을 편찬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제작할 때도 ‘대동여지도’를 참조해 행로를 기술했다. 

약현에서 빚은 청주는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특히 조선 초 형조판서를 지낸 서거정의 현손으로 대문인이자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충숙공 약봉 서성(1558~1631)이 빚은 술은 ‘약산춘(藥山春)’으로 불렀다는 문장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나온다. 정월 첫 해일(上亥日)에 흰쌀 5말과 누룩 5되를 물 5병에 담가 빚은 약산춘은 술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이 약산춘에서 ‘좋은 술’이라는 뜻의 ‘약주(藥酒)’가 유래했다.

서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약현에 이르는 공간은 한국천주교와 인연이 깊다. 조선천주교 최초의 사제 서품식이 1896년 4월 26일 이 공간에서 있었고, 그 훨씬 전이던 1756년 영조 32년 조선인으로선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 베드로(1756~1801)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이승훈은 선교사가 없던 환경에서 자발적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인 뒤 베이징으로 건너가 세례를 받고 천주교 전파에 나섰던 인물이다. 무악재에서 발원해 돈의문을 지나 한강으로 이어지던 만천(蔓川) 가에서 자란 까닭에 호도 ‘만천’으로 지었다.

1892년 언덕 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약현성당은 존재감이 크다. 서구식 벽돌조 교회 건축물로 길이 32m, 폭 12m, 종탑 높이 26m다. 1886년 프랑스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한 이후 고종이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지었다. 프랑스인 코스트 요한(1842~1896) 신부가 설계·감독했다. 명동대성당과 인천 답동성당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85년 조선교구에서 성당 설계와 건축에 전념했다. 한글을 프랑스어로 풀이한 『한불자전』과 『한어문전』 출판에도 힘을 보탰다. 구보는 이들이 대한제국이 생기기 훨씬 전 이미 조선을 뜻하는 ‘한(韓)’ 자를 ‘삼한(三韓)’에서 따서 사용했으며 로마자로 한글 발음을 표기한 사실에 경의를 표한다. 『한불자전』은 ‘한글 가로쓰기를 선보인 최초의 문헌’이란 기록도 갖고 있다.

약현에 성당이 들어선 데는 순교자 처형지였던 인근의 서소문 밖 사거리의 존재가 작용했을 것으로 한국천주교는 풀이한다. 이승훈을 위시해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과 약종의 아들 정하상, 황사영 등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1999년 서울대교구는 이 성지에 ‘서소문 밖 순교자 현양탑’을 세워 순교자들을 기렸다. 높이 15m, 너비 13m의 좌우 대칭탑에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103명 중 44명의 희생자 명단이 새겨져 있다. 이곳이 참수 처형지로 기능한 데는 인근 소의문이 시체를 성 밖으로 옮기는 시구문 역할을 했던 지리적 성격 탓이 아닌가 구보는 여긴다. 일찍이 허균도 이곳에서 참형을 당했고, 홍경래의 수급도 이곳에 3일간 내걸린 바 있었다. 죽음의 이미지가 또 다른 죽음을 부른 셈이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약현성당을 찾아 참배했다. 성당 아래 14처는 사진 애호가들도 즐겨 찾는 공간이다.

구보는 약현성당 언덕에서 중림동을 굽어보며 이 공간을 스쳐 지나간 시간을 반추한다. 구성원들의 부단한 노력이 긍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확인하며 매사가 다 제 뜻을 지님을 재인식한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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