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사람 그리고 세계문화유산
랭스 대성당 -프랑스 절대왕권의 상징건물로 우뚝 서다
클로비스 1세 이후 대관식장 전통
중세 말 불에 타자 고딕식 재건립
성당 정면 81m 높이 쌍탑 압도적
잔 다르크, ‘신의 계시’라 주장하며
샤를 7세 즉위식 이 성당에서 강행
왕권에 민심 모아 ‘백년전쟁’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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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에서 ‘프랑스’ 하면 사람들은 흔히 1789년 발발한 프랑스 대혁명을 떠올린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수백 년을 이어온 부르봉 왕조의 절대왕권이 민중의 저항으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한 것처럼 누리는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이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제기됐다. 그렇다면 반대로 그토록 장기간 지속된 절대왕권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물론 우리가 학생 시절에 배운 왕권신수설과 같은 정치사상도 무시할 수 없다. 여기에 하드웨어 측면에서 프랑스 왕권에 신성성을 부여한 대표적인 건물이 바로 중세 고딕건축의 정수로 꼽히는 랭스 대성당(노트르담 드랭스 대성당·Notre-Dame de Reims Cathedral)이다.
랭스 대성당은 이름 그대로 파리 동북쪽으로 약 130㎞ 떨어진 도시 랭스에 있다. 랭스 대성당은 중세 프랑스가 영국과 치른 백년전쟁(1337~1453) 기간 잔 다르크(Jeanne d’Arc·1412~1431)의 등장과 활약에 깊은 관련을 맺으며 풍성한 얘깃거리를 더하고 있다. 당시 영국군의 랭스 지역 점령으로 대관식을 올리지 못하고 왕세자로 있던 샤를 7세가 잔 다르크 도움으로 랭스를 탈환한 뒤 랭스 대성당에서 국왕으로 대관식을 거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국왕의 대관식 장소가 수도 파리가 아니라 먼 지방 도시 랭스였을까? 더 근본적으로 왜 이곳에, 그것도 중세 초반에 이토록 큰 성당을 세웠을까? 랭스 대성당의 건립은 프랑스 왕권과 깊은 연관이 있다. 랭스는 이미 로마 시대부터 교회 조직이 잘 갖춰진 갈리아의 종교 중심지였다. 특히 프랑크 왕국 초기인 496년경 클로비스 1세가 이곳에서 세례받은 것을 계기로 기독교 전통과 정치적 상징성이 깊은 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바로 클로비스 1세의 세례 사건은 후대 프랑스 왕들에게 ‘랭스에서의 대관식 전통’을 정착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실제로 816년 루이 1세부터 1825년 샤를 10세까지 프랑스 국왕 33명이 바로 랭스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랭스는 자연스럽게 ‘왕의 도시’라는 명성을 얻으면서 199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랭스 대성당이 현재 모습을 갖춘 것은 중세 말경이다. 기존 성당이 1210년 화재로 소실되자 프랑스 왕실과 교회는 웅장한 규모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시설의 기능을 넘어서 왕권의 정당성을 영속화하려는 국가적 프로젝트였다. 1211년 착공한 건립공사는 13세기 말경에야 주요 외관이 완성됐다. 내부 장식 및 조각 등은 14세기까지 이어졌다. 이처럼 랭스 대성당 건축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지면서 수직성 강조, 넓은 스테인드글라스 창, 정교한 부조와 조각 같은 중세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전형을 극대화한 것으로 손꼽힌다.
이제 대성당의 특징적인 요소들을 좀 더 살펴보자. 성당 전면은 성경 이야기와 성인·천사 조각상으로 채워져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일명 ‘미소 짓는 천사상’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천장 높이가 38m에 달하는 성당 내부의 중앙 예배당은 천상을 향한 열망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대성당에서 가장 강렬하게 방문객의 시선을 끄는 곳은 높이가 무려 81m에 달하는 성당 정면의 거대한 고딕식 쌍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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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스 대성당은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으로도 명성이 높다. 중세의 전통적 스테인드글라스에 1974년경 유명화가인 마르크 샤갈이 제작한 현대적 감각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더해지면서 신앙적 신비감과 예술적 가치를 더욱 드높이고 있다.
랭스 대성당 내부에 보관·전시돼 있는 유물과 상징물 역시 명성이 높다. 이곳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치러진 장소였기 때문에 왕권의 신성성과 관련된 유물이 다수 존재한다. 성유(聖油)와 ‘성유병(聖油甁)’이 대표적인 유물이다. 대관식의 핵심은 왕을 성유로 ‘기름 부음’하는 의식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클로비스의 세례 당시 성령의 비둘기가 하늘에서 성유가 담긴 병을 가져왔다. 이 성유는 모든 프랑스 국왕의 대관식에서 예외 없이 사용될 정도로 국가적 성물로 인식됐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랭스 대성당은 중세 말 영국과 프랑스 간 벌어진 백년전쟁 중 국가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백년전쟁 말기인 15세기 초 프랑스 상황은 매우 암울했다. 특히 왕위 계승을 둘러싼 위기가 이어지면서 홈그라운드였음에도 영국군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영국군과 동맹세력인 부르고뉴파가 랭스를 비롯한 프랑스 북부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불안정한 왕세자였던 샤를 7세는 즉위 자체가 불가능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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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잔 다르크였다. 1429년 잔 다르크는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왕세자 샤를을 만났다. 그녀는 “샤를이야말로 정당한 프랑스의 왕이며, 반드시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말하며 이것이 자신이 신으로부터 받은 계시라고 주장했다. 샤를은 처음에 뜬금없는 얘기를 하는 그녀를 의심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가 이끈 군대가 예상을 뒤엎고 1429년 5월 오를레앙 공방전에서 승리하면서 백년전쟁의 흐름이 프랑스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잔 다르크는 여세를 몰아 군대를 이끌고 북진했고, 프랑스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1429년 7월 중순 마침내 랭스 입성에 성공했다.
입성 바로 다음 날 샤를 7세는 선대 프랑스 왕들의 전통을 따라 랭스 대성당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이는 프랑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역사적 순간으로 평가된다. 드디어 샤를 7세가 정통성을 지닌 프랑스의 왕으로 공식화되면서 프랑스인의 민심을 왕권에 결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백년전쟁을 승리의 길로 인도한 결정적 순간이기도 했다. 대관식 이후 프랑스는 빠르게 국력을 회복했다. 이후 수십 년에 걸쳐 영국군을 수세로 밀어 넣으며 마침내 1453년 카스티용 전투 승리를 마지막으로 백년전쟁을 승리로 마감할 수 있었다.
이처럼 랭스는 프랑스 왕실의 역사가 응축된 도시로 긴 세월 동안 프랑스 왕권을 상징하는 장소로 기능했다. 지금은 파리에서도 당일치기 여행이 가능해 매년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더구나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주도하고 있는 랭스 대성당은 왕권의 표상 외에 중세 고딕 건축과 예술의 정수를 담고 있다. 일반 관광객에게는 ‘빛과 공간,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가 어우러진 감동을, 역사와 문화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역사 속 ‘프랑스 왕권과 국가 정체성의 상징’을 체험할 수 있는 매력을 선사하고 있다. 1991년 유네스코가 대성당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배경에는 단순한 종교 건축물을 넘어 프랑스 왕권·역사·예술의 복합체라는 역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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