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고지에서 배운 책임의 언어

입력 2025. 12. 15   14:46
업데이트 2025. 12. 15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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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전문임기제 가급 국군수도병원 성형외과 의사
황건 전문임기제 가급 국군수도병원 성형외과 의사

 


“기억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오늘의 책임이며 내일을 지키는 힘이다.”

나는 국군수도병원에서 외상을 담당하는 군의관으로 여러 지역에서 후송되는 환자들을 수술한다. 가까운 지역에서 오는 환자들은 추적조사가 어렵지 않지만 전방에서 오는 환자들은 이동 거리가 길어 퇴원 후 외래 방문을 자주 하지 못한다. 그래서 전방부대에서 오는 환자들에게는 더 마음이 쓰인다.

지난 추석 연휴에 전방의 전적지를 방문해 보고 싶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환자들이 근무하는 현장을 직접 느껴보고, 가능하다면 그 지역 의무실도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이번 연휴에는 춘천의 전승기념탑과 철원의 백마고지를 다녀왔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일대에서 벌어진 치열한 고지전이었다.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하늘에서 내려다볼 때 능선이 마치 백마의 등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졌다.

대한민국 육군9보병사단과 중국 인민지원군은 이 고지를 사이에 두고 열흘 동안 무려 24차례나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격전을 벌였다. 수만 발의 포탄이 쏟아지며 능선은 초토화됐고, 수천 명의 전우가 이곳에 쓰러졌다. 전투 끝에 국군이 고지를 사수했고, 9보병사단은 이 승리를 기념해 ‘백마부대’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기념탑에 새겨진 글은 세월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이곳에는 아직도 포성이 들리는 듯하다. 참혹한 전란으로 평화롭던 이 강산이 폐허로 변했던 그 시절 용사들은 전우의 시체를 넘어 저 백마고지를 향하여 울부짖으며 돌진해 갔다.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하는가? 기억하는 이는 점점 세상을 등지고 젊은이들은 점점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 되묻고 있다. 이제 우리는 피 흘려 지킨 자유의 소중한 값을 큰 소리로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우리 조국의 영생번영을 위한 것이다. 통일을 염원하며 이 전승지를 님들과 후손들에게 바친다. 1990. 5. 3. 보병 제5사단 사단장 소장 김봉찬.”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점점 세상을 떠나는 지금, 젊은 세대에게 전쟁의 의미와 희생의 가치는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글귀는 행동과 교육의 책임을 촉구한다. 자유와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용사의 피와 헌신 위에 세워진 값진 자산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다.

이 구절을 읽으며 제1차 세계대전의 추모 시, 존 매크레이의 ‘In Flanders Fields’를 떠올렸다.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We shall not sleep, though poppies grow in Flanders Fields(만일 살아 있는 그대들이 죽은 우리와의 믿음을 깬다면 우리는 잠들지 못하리라. 이 플랜더스 전장에 양귀비꽃이 피더라도).”

매크레이의 시와 백마고지 기념비의 글귀는 죽은 자와 산 자를 잇는 ‘책임의 언어’다.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이자 당부다.

백마고지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배들의 정신적 증거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전해진 무언의 유언이다. 그들이 싸운 이유를 묻는 후손들에게 우리는 자유의 소중함과 대가를 가르쳐야 한다.

강원도 철원에서 외상 환자들이 온다면, 나는 그들이 지키는 그 고지에서 전사한 3000여 전우들의 피와 땀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정성껏 치료하는 데 힘을 기울일 것이다.

“백마고지의 침묵은 잊힘이 아니라, 우리에게 남겨진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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