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트렌드
AI 스타트업 몸값의 역설 : 돈은 더 버는데 평가는 왜 낮아질까
오픈AI ‘평균 멀티플’ 연환산 매출의 36배
희소성 떨어지며 연초 대비 30%나 하락
절대적 기업가치 천문학적 수준 이지만
‘AI’ 타이틀로 프리미엄 받는 시대는 끝나
AI 산업, 폭발적 성장기 지나 성숙기 진입
거품론 속 ‘옥석가리기’ 새로운 국면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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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오픈AI가 역사적인 거래를 발표했다. 3년 라이선싱 계약과 함께 디즈니가 오픈AI에 10억 달러(약 1조4000억 원) 규모의 지분 투자를 단행한 것이다. 이 계약으로 오픈AI의 영상 생성 AI ‘소라’는 미키마우스, 아이언맨, 다스베이더 같은 디즈니 캐릭터를 활용한 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 됐다. 디즈니플러스 이용자는 머지않아 AI가 생성한 디즈니 캐릭터 영상을 스트리밍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이 거래는 양측 모두에 전략적 의미가 크다. 오픈AI에는 그동안 불거진 저작권 침해 논란에 대한 선제적 대응이 된다. 생성형 AI가 학습 데이터로 활용한 저작권 콘텐츠의 법적 분쟁이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세계 최대 IP 보유 기업과 공식 계약을 맺었으니 “우리는 불법 학습이 아니라 정당한 라이선싱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한 셈이다.
디즈니 역시 AI 시대에 뒤처지지 않겠다는 선언인 동시에 전통적인 콘텐츠 제작·배급 모델을 넘어 AI 기반 인터랙티브 콘텐츠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디즈니가 오픈AI의 기업 고객이 되는 동시에 추가 지분 매입 워런트까지 확보했다는 점은 이번 거래가 단발성 마케팅 협업이 아닌 장기적 전략적 파트너십임을 보여준다.
매출은 폭증하는데 멀티플은 하락하는 역설
그러나 디즈니·오픈AI 딜 같은 화려한 거래의 이면에서 AI 스타트업 생태계는 흥미로운 구조적 변화를 겪고 있다. 가장 주목할 현상은 ‘매출 대비 밸류에이션 멀티플’(주가 배수)의 지속적인 하락이다.
오픈AI와 앤스로픽, 두 대형 AI 모델 개발사의 평균 멀티플은 현재 연환산 매출의 36배 수준이다. 올해 2월에는 51배였으니 불과 10개월 사이 약 30% 떨어진 것이다. 커서, 런웨이, 신테시아 등 AI 앱 기업들의 멀티플 역시 같은 기간 65배에서 53배로 낮아졌다. 물론 이들 기업의 절대적 기업가치는 여전히 천문학적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매출 성장 속도와 비교했을 때 투자자의 기대치는 점차 현실적인 방향으로 조정되고 있다.
투자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멀티플’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자. 멀티플(배수)은 쉽게 말해 ‘이 회사가 매출의 몇 배 값어치가 있느냐’를 나타내는 숫자다. 예를 들어 연매출 100억 원인 회사가 1000억 원의 기업가치로 평가받으면 10배 멀티플이다. 같은 매출인데 2000억 원으로 평가받으면 20배 멀티플이 된다. 멀티플이 높다는 것은 ‘이 회사의 미래 성장 가능성이 크다’고 시장이 믿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멀티플이 낮아진다는 것은 ‘이제 좀 현실적으로 평가하자’는 신호로 읽힌다.
일반적인 상장 소프트웨어 기업들의 평균 멀티플은 8배 수준이다. 벤처캐피털(VC) 메리테크에 따르면 이 평균치에는 성장이 정체된 기업이 다수 포함돼 다소 낮게 나타난 측면이 있다.
실제로 고성장을 지속하는 팔란티어의 경우 현재 선행 매출 기준 77배의 멀티플에 거래되고 있다. 그럼에도 AI 기업의 36배, 53배라는 멀티플은 일반 소프트웨어 기업 대비 여전히 4~6배 높은 수준이다. 다만 불과 10개월 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낮아졌다는 점이 핵심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첫 번째 이유는 성장률 둔화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연매출 1억 원인 회사가 2억 원으로 성장하면 ‘100% 성장’이라고 환호한다. 하지만 연매출 1조 원인 회사가 2조 원이 되려면 똑같이 100% 성장이지만 난도는 비교할 수 없이 높다. 오픈AI와 앤스로픽은 이미 연 수조 원의 매출을 내는 대형 기업이 됐다. 앤스로픽의 경우 최근 몇 달 사이 연환산 매출이 50억 달러에서 70억 달러로 성장하며 여전히 견조한 성장세를 나타내고 있지만 초기처럼 10배, 20배 성장은 물리적으로 어려워졌다. 투자자들도 이를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시장의 성숙화다. 2023년에는 “AI 합니다”란 한마디면 투자금이 몰렸다. 하지만 이제 투자자들은 “그래서 매출이 얼마인데요?”라고 묻는다. AI라는 이름값만으로 무제한적 프리미엄을 받는 시대가 지나고 있다. 이는 AI산업이 초기 하이프 사이클을 지나 본격적인 성장기에 진입했음을 시사하며 건강한 시장 조정의 신호로 해석될 수 있다.
신생 스타트업들은 여전히 천문학적 평가
아이러니한 점은 초기 단계 AI 스타트업들은 여전히 말도 안 되는 멀티플로 투자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형 AI 기업들의 멀티플이 하락하는 와중에도 신생 기업들에는 오히려 더 공격적인 베팅이 이뤄지고 있다.
AI 고객지원 스타트업 시에라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시에라는 최근 연환산 매출 1억 달러(약 1400억 원)를 돌파했다. 그런데 기업가치가 96억5000만 달러(약 13조 원)에 달해 거의 100배 멀티플을 기록했다. 물론 이는 2월의 217배에 비하면 크게 낮아진 수치이긴 하다. 그래도 매출의 100배라니 일반적인 기업 평가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숫자다.
코딩 AI 스타트업 커서는 연환산 매출 10억 달러 이상을 기록하며 투자 전 기준 270억 달러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았다. 27배 멀티플인데, 이 업계에서는 오히려 저평가로 여겨질 정도다. 오픈소스 모델 개발사 미스트랄은 연환산 매출 1억 달러로 138억 달러의 밸류에이션을 기록해 138배 멀티플을 보였다. AI 오디오 스타트업 일레븐랩스는 미스트랄의 두 배인 2억 달러의 연환산 매출을 기록하고도 66억 달러에 평가받아 같은 매출 구간 내에서 상당한 밸류에이션 격차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런 격차를 설명하는 핵심 요인은 두 가지다. 하나는 VC업계에 만연한 ‘놓칠까 두려움(Fear Of Missing Out·FOMO)’ 심리다. 많은 VC가 초기 AI 딜에서 배제된 경험에 대한 후회를 안고 있다. 2022~2023년 오픈AI, 앤스로픽의 초기 라운드에 참여하지 못한 투자자들이 ‘다음 오픈AI’를 찾기 위해 공격적으로 베팅하고 있는 것이다. 높은 가격을 지불하더라도 일단 AI 포트폴리오를 확보하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다른 하나는 스타 창업자의 프리미엄이다. 시에라의 공동창업자 브렛 테일러는 세일즈포스의 공동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한 실리콘밸리의 거물이다. AI산업이 여전히 초기 단계에 있어 기술적 불확실성이 높은 만큼 검증된 리더십에 대한 신뢰가 투자 의사결정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거품 속에서 진짜를 가려내는 시기
현재 글로벌 AI산업은 폭발적 성장기를 지나 성숙기로의 전환점에 서 있다. 천문학적 밸류에이션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투자자의 눈높이는 점차 실질적인 매출과 수익성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디즈니·오픈AI 딜로 대표되는 대형 파트너십은 AI 기술이 전통 산업과 본격적으로 융합하는 새로운 국면의 서막을 알리고 있다.
이것은 거품이 빠지는 것이 아니라 거품 속에서 진짜를 가려내는 과정이다. 대형 AI 기업들의 멀티플 하락은 시장이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조정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동시에 스타 창업자가 이끄는 신생 기업에 대한 공격적 베팅은 ‘다음 빅 싱’을 향한 투자자의 갈증이 여전함을 보여준다.
한국의 기업과 투자자에게 이 시기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글로벌 AI 생태계의 빠른 변화를 면밀히 추적하면서 K콘텐츠와 기술력이라는 한국의 강점을 AI 시대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지 전략적 고민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밸류에이션 거품이 걷히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실질적인 가치 창출 역량을 갖춘 기업이 진가를 발휘할 기회의 창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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