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진 배꽃 아래, 금지된 배움의 길로

입력 2025. 12. 11   14:51
업데이트 2025. 12. 11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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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의 산보 - 그때 그곳
정동 이화학당, 한국 최초의 여학교 

고관대작의 소실 김 부인, 가난한 집 열 살난 꽃님이, 콜레라에 버려진 네 살 별단이…
조선 여성 열악한 지위 목격한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이 1886년 설립
한 사람 한 사람 존중하는 교육 표방
복수형 Women 대신 ‘Womans’ 유래
남성 교사에 대한 거부감 장벽되기도
한국 여성교육 굳건한 뿌리 역할해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이화여고 전경. 필자 제공
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이화여고 전경. 필자 제공


서울 중구 정동은 근대의 기억을 안고 있는 공간이다. 왕궁과 외국공관, 학교, 교회들이 그 면면이다. 정동길 가운데에는 유서 깊은 이화여고가 위치한다. 이화학당으로 시작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학교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턴(1832~1909)이 설립했다. 감리교는 18세기 영국에서 복음주의 운동으로 시작된 개신교 교파였는데,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성결 생활 체험 외에 사회 박애 실천에 매진했다. 한국에는 1885년 헨리 아펜젤러(1858~1902)와 스크랜턴 두 가문이 소개했다.

당시 53세이던 스크랜턴은 6월에 의사인 아들 윌리엄(1856~1922)과 함께 조선으로 들어와 선교활동을 폈다. 메리는 11월에 현재의 이화여고 부지에 있던 200평 규모의 조선집을 사들여 학당을 지었다. 축대 위에 세워진 널찍한 기와집으로 좌우가 방이고 가운데가 마루 공간인 구조였다. 당시 정동은 덕수궁과 공관들의 존재 덕에 안전하면서도 역동적인 공간이었다. 메리가 이곳에 여학교를 설립하려 한 것은 조선의 보수성이 새로운 자극을 받기에 적합한 공간이라 판단해서였을 것으로 구보는 짐작한다.

메리는 조선 여성들의 열악한 지위와 남성 전유물이던 교육 환경을 목도하자 즉시 여학교 설립에 들어갔다. 메리는 “여성도 배워야 하고 이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조선이 강해진다”는 주장을 폈다. 당시 조선은 여성 교육에 익숙지 않았던 터라 메리의 생각은 반향을 얻지 못했다. 개교를 했는데도 입학생을 받지 못하다가 1886년 5월 31일에야 첫 번째 학생이 입학했다.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사가 되고 싶어 했던 고관의 소실 김 부인이었다. 이로써 1명의 학생을 위한 메리의 교육이 시작됐다. 오늘날 이화여대의 영문 교명이 ‘Ewha Womans University’인 유래다. 복수인 ‘Women’ 대신에 단수인 Woman에 s를 붙여 쓴 것은 ‘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는 교육’이라는 뜻이 내포돼 있다.

유교 사회에서 여학교를 운영하는 일은 순탄치 않았다. 재정난에 모집난 그리고 남성 교사에 대한 거부감이 따랐다. 교사이던 메리의 아들은 휘장을 친 채 수업을 진행해야 했다. 이곳에서는 한글, 영어, 한문, 성경을 가르쳤다. 기숙사를 만들어 숙식을 제공했다. 첫 학생 김 부인이 병이 나 3개월 만에 학업을 중단했고, 가난한 집의 열 살 난 꽃님이가 들어왔으나 “서양인들이 아이를 외국으로 팔아버린다”는 괴소문이 돌아 “어머니 허락 없이 10리 밖도 나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써주고 겨우 붙잡았다. 사정사정해서 학생을 구한 것이다. 이어 콜레라로 버려진 네 살 별단이가 합류했고, 훗날 미국 유학을 거쳐 한국 최초의 여의사가 되는 박에스더(김점동)가 입당했다.

 

 

1893년 촬영한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 맨 뒷줄 우측이 메리 스크랜턴. 출처=이화역사관
1893년 촬영한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 맨 뒷줄 우측이 메리 스크랜턴. 출처=이화역사관

 

1896년 촬영한 이화학당 저학년생들. 출처=미국연합감리교회
1896년 촬영한 이화학당 저학년생들. 출처=미국연합감리교회



이듬해 2월 고종으로부터 ‘이화(梨花)’를 교명으로 받았다. 정동이 배밭 천지였던 연유가 컸다. 아들 윌리엄은 여성 전용 병원 보구녀관(普救女館)을 설립해 치료뿐 아니라 최초의 여성 의학 교육도 폈다. 한국 최초의 간호사 김마르타, 이그레이스 등을 배출했다.

개교 당시 이화학당 모습은 그 무렵 감리교 선교사로 조선에 온 룰루 E. 프라이(1868~1921)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프라이는 미국 오하이오에 사는 부모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냈다. 그 속에 당시 조선 사회와 교회, 그리고 이화학당 모습을 충실히 그렸다. 프라이는 조선에 당도한 1893년부터 이화학당에서 35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이대 정덕애·최주리 두 교수가 프라이의 편지들을 묶어 번역한 『정동의 봄』에 그때의 풍경들이 담겼다.

구보는 산수를 가르쳤던 방법에 미소를 지었다. 오늘날과는 확연히 다른 예스러운 방법이었다. 교사인 룰루 프라이가 1894년 5월 3일 미국의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곱셈 교육법을 소개했다. “둘 분 셋 여섯 있소(2×3 is 6)” 식이었다. 조선어는 배우기에 어려웠던 모양이다. 조선인 교사는 영어를 모르고 선교사 학생들은 조선말을 모르는 채로 오전과 오후에 각각 3시간씩 조선어 수업이 진행됐다. 학생들이 눈치껏 조선어를 익히는 수밖에 없었다. 외국인들은 ‘조선어가 일본어나 중국어보다 더 어렵다’고 여겼다.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던 프라이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만들어 놓은 『불한사전』의 도움을 받았다. 조선어에 능통해 ‘아리랑’ 가사도 번역했던 선교사 호머 헐버트(1863~1949)로부터 매주 화요일 밤 강의를 받기도 하며 조선어를 습득해 나갔다.

교사들은 가르치는 일 외에 학당을 가꾸는 작업에도 정성을 쏟았다. “스크랜턴 부인은 잔디와 꽃을 가꾸지. 작은 과일나무 외에도 포도와 산딸기와 블루베리와 까치밥과 딸기를 키워. 그 모두를 미국에서 가져왔단다” “어젯밤 여학생 하나가 올림머리를 하고 앞머리는 동그랗게 말고 오더니 자기가 프라이 선생님이라네”라는 편지 구절은 서양인 교사와 조선인 학생이 이질감을 이겨내고 동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들은 설날이 되면 서양 선생님들에게 세배하러 왔다. “여자아이들은 사내애들과 다르게 절하는데 아주 예뻐”라고 프라이는 기술했다. 세배 후에는 함께 연을 날리고 널을 뛰며 시간을 보냈다. 그녀의 편지를 들여다보면 선교사들이 조선 여학생들을 이방인이면서 동시에 친근한 자매로 대했음이 감지된다.

학생 수가 35명으로 늘어나자 학당은 1897년 기존의 한옥 교사를 헐고 그 자리에 서구식 2층 건물을 지었다. 초·중·고등 과정 외에 대학과도 신설해 1914년 제1회 대학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의사, 간호사, 변호사, 교사 등 여성 전문가로 성장했다.

이화학당은 1935년 헨리 아펜젤러의 딸로서 이화학당 전문부를 맡은 앨리스 아펜젤러(1885~1950)가 신촌으로 옮겨 지금에 이른다(『이화여자대학교』). 태평양 전쟁 탓에 미국으로 돌아갔던 앨리스는 1945년 다시 돌아와 이화여대 명예총장을 맡았다. 그녀는 설교 도중 쓰러져 순직했다(『인명사전』). 이화여대는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큰 여성대학이다.

구보는 140년 전 서양 선교사들이 낙후한 조선 사회에서 생활하느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교육을 통해 ‘한국인을 더 나은 한국인(Koreans better Korean’s only)’으로 만들고 싶은 열정의 끈을 놓지 않은 데 경의를 표한다. 그들이 있어 오늘의 우리 여성 교육이 굳건히 뿌리 내릴 수 있었고, 교육받은 여성들의 존재가 한국 중산층의 성장을 이끌었다. 이 땅에 신사임당과는 다른 새로운 여성상을 구현한 것이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필자 안상윤은 KBS와 SBS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홍콩·베이징 특파원, 팀장 겸 앵커, 스포츠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친구들은 ‘구보(仇甫)’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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