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곁에, 예술
그림 속 사계 -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살아가는 하루…피터르 브뤼헐 ‘눈 속의 사냥꾼’
썰매·스케이트 타며 겨울놀이 즐기는 동네 사람들…
눈 덮인 산, 숨은 그림 같은 농민 일상 정교하게 묘사
언덕 위서 풍경 내려다보듯 그린 ‘발코니 기법’ 특징
수확 실망스러운 사냥꾼과 가혹한 조건 속 노동의 모습
평온한 풍경이 주는 여유, 겨울의 즐거움 묻어나지만
그 아래 감춰진 고난과 불길함, 생존의 긴장 담담히 포착
|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이 오면 서로의 안부를 묻고 따뜻한 마음을 전한다. 요즘엔 글보다 모바일을 통해 사진이나 이모티콘, 밈을 보내는 것에 더 익숙하다. 손글씨로 크리스마스 종이카드나 연하장을 쓰지 않게 되면서 문구점 앞 진열된 카드를 고르는 일은 추억이 됐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종이카드와 이모티콘에는 크리스마스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가 있다. 세계에서 크리스마스카드 표지로 가장 많이 사용된 그림, 약 450년 전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눈 속의 사냥꾼’이다. 꽁꽁 얼어버린 시골 마을을 그린 이 작품은 정감 어린 겨울 풍경과 차가운 계절의 온도를 섬세하게 표현해 오랫동안 겨울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사랑받아 왔다.
브뤼헐은 ‘농민 화가’라는 별칭답게 플랑드르(지금의 네덜란드) 농촌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즐겨 그렸다. ‘눈 속의 사냥꾼’은 그가 사계절을 주제로 제작한 여섯 점의 연작 가운데 하나다. 일반적으로 계절 풍경을 그린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는 나무, 하늘 같은 자연이 주인공이 되지만 브뤼헐의 그림에는 예외 없이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 작품은 그의 다른 그림에 비해 덜 붐비는 편이지만 숨은그림을 찾듯 화면 곳곳에 있는 인물을 발견하는 것이 감상의 재미다.
그림은 언덕 위의 사냥꾼에서 시작해 아래로 넓게 펼쳐진 빙판과 그 너머 눈 덮인 산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이끈다. 빙판 위에는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 겨울 놀이를 즐기고 있다. 그림의 가장 아래쪽에서는 한 여성이 붉은 치마를 입은 다른 여성을 위해 썰매를 끌어주고, 다리 근처에 선 사람들은 팽이치기 혹은 컬링과 비슷한 아이스슈톡을 하고 있다. 하키에 열중하는 이들도 보이고, 세 명의 아이는 한 줄로 나란히 스케이트를 타고 지나간다.
이 작품에는 겨울을 즐기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빙판 사이로 난 길 위에는 짐을 가득 싣고 가는 나귀를 끌며 걷는 사람이 보인다. 다리 위에는 제 몸집보다 큰 나뭇단을 머리에 이고 힘겹게 걸어가는 인물도 있다. 멀리에서는 굴뚝 위로 치솟은 불길을 잡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집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눈에 띄는 인물은 관람객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냥꾼들이다. 세 사냥꾼은 장비를 메고 발목까지 차오른 눈을 헤쳐 나가고 있다. 이날의 수확은 어깨에 멘 마른 여우 한 마리가 전부다. 그들을 따라 언덕을 오르는 사냥개 무리는 먹잇감이 부족해서인지 고개를 숙인 채 주변을 살피며 걷는다. 사냥개들의 배는 며칠 굶은 듯 홀쭉해 보인다. 혹독한 겨울, 얼어붙은 땅에서 먹이를 찾기 어려운 계절임을 보여준다.
브뤼헐의 그림에서는 특징적인 ‘시그니처’ 구도가 발견된다. ‘눈 속의 사냥꾼’을 포함해 그의 몇몇 작품은 마치 관람자가 마을의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으로 그려져 있다. 관람객은 사냥꾼들 바로 근처 언덕에 서서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발아래로 시야가 탁 트인 전경을 보여주는 구성을 ‘발코니 기법’이라고 부른다. 브뤼헐의 계절 그림 6점은 모두 이 방식을 따른다. 사냥꾼 가까이에 서 있는 네 그루의 나무는 화면에 뚜렷한 수직선을 만들어 안정감을 주고 관람자 시선을 자연스럽게 화면 안쪽 마을 풍경으로 이끈다.
그림 속 까마귀와 까치는 잎을 모두 떨어낸 헐벗은 가지에 앉아 있거나 그 주변을 맴돈다. 고요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까마귀는 어딘가 불길한 기운을 풍긴다. 플랑드르에서 까마귀와 까치는 죽음이나 악천후를 암시하는 존재로 여긴다. 빙판 위 사람들에게서는 여유와 겨울의 즐거움이 묻어나지만 그림 한쪽에는 무거운 삶을 짊어진 노동자와 굶주린 생명이 자리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평온한 풍경에 스며 있는 고난, 즐거움 아래 감춰진 불길함, 삶의 유희 이면에 자리한 생존의 긴장이 공존한다.
‘눈 속의 사냥꾼’이 그려진 시대를 살펴보면 브뤼헐이 풍요만을 그릴 수 없던 이유가 드러난다. 1500년대는 세계적으로 소빙하기가 찾아왔다.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면서 알프스 빙하는 마을 가까이 내려왔고, 영국 템스강은 여러 차례 얼어붙었다. 이 작품이 제작된 1565년은 플랑드르 지역에 특히 혹독한 추위가 이어진 해로 기록된다. 식량이 부족해 굶주림이 만연했고, 수천 명이 추위로 목숨을 잃었다. 새들이 하늘에서 얼어떨어질 정도였다고 하니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을 떠올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플랑드르 사람들에게 겨울은 새하얀 눈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설경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맞서야 하는 혹독한 계절이었다. 그래서일까. 브뤼헐의 겨울 그림은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는 화가답게 ‘눈 속의 사냥꾼’에서 겨울이라는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하루를 버티며 먹거리를 구하고 노동을 이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포착했다.
이 그림은 크리스마스카드 표지로 큰 인기를 끌었을 뿐 아니라 여러 영화와 소설에도 등장했다. SF 영화 ‘솔라리스’(1972)에서는 우주의 비현실적 풍경과 대비되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정서를 환기하는 장치로 사용됐다. ‘멜랑콜리아’(2011)에서는 세계의 종말을 준비하는 주인공이 무기력한 상태에서 점점 평온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이 그림과 함께한다. 다양한 매체에서 브뤼헐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고난이 닥치더라도 초연하게 삶을 이어가는 태도를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에게도 어쩌면 흔들림 없이 담담하게 버티는 마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