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시작하고 녹초가 돼 집에 돌아오면 눈뜰 때부터 이미 집을 나서고 없는 아빠를 온종일 찾고 기다린 딸아이와 마주한다. 분주함에 잠시 제쳐 뒀던 애틋함과 사랑을 발판 삼아 ‘오늘은 기필코 딸아이와 최선을 다해 놀아 주겠노라’고 마음먹지만, 이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른함과 피로가 몰려온다. 어느새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내 곁에서 딸아이는 온갖 몸짓으로 애교를 부린다.
“오늘은 이 정도 함께 놀았으면 됐어. 이제 자러 가자. 내일 또 놀자.” 무겁게 내려오는 졸린 눈꺼풀과 맞서 싸우며 아빠와 더 놀려고 떼쓰는 딸아이를 억지로 재운다. 아빠가 또 조용히 자기 곁을 떠날까 불안함에 옷자락을 꼭 움켜쥐고 잠든 딸아이를 쳐다보며 수많은 감정이 밀려와 가슴을 짓누른다. 아빠가 전부인 이 아이에게 오늘 내 사랑은 최선이었나, 아니면 적당함이었나? 오늘 내 하루와 또 마주한 이들에게는 어땠나?
일상생활에서 우리를 겨누고 있는 사소하고 치명적인 유혹이 바로 ‘적당함’의 유혹이다. 적당함은 종종 상황의 한계 앞에서 최선의 포기를 합리화하는 수단이 되곤 한다.
실제로 우리 몸과 시간은 유한하기에 내 삶에서 모든 것을 다 붙잡을 수 없다고 하는 현주소를 마주한다. 그 결과 ‘최선을 위한 희생’ ‘선택과 집중’이란 좋은 명분 아래 우리는 삶의 어느 한 부분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속상함을 적당함으로 타협한다. 그 타협의 자리가 때론 우리의 가정이 되기도 하고, 사람이 되기도 하고, 건강이 되기도 한다.
성경 말씀 중 요한복음 13장 1절은 예수님이 인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아셨다. 이미 모든 걸 쏟아부은 여정이었기에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의 시간에서 아주 작은 여유 한 톨을 욕심내는 건 사치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분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또 짜내고 짜내 끝까지 사랑하는 시간으로 소비하셨다. 그 사랑은 적당함이 아닌 최선의 것이었으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마지막의 시간을 가까이할수록 첫 마음과 첫 열정을 잃어버리곤 한다. 모든 것을 쏟아붓던 우리의 최선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적당함에 최선을 내준 스스로에게 때론 칭찬하고 또 자책한다.
어느덧 한 해의 마지막 시간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올 한 해 우리의 삶은 최선이었나, 아니면 적당함이었나? 우리의 한계 앞에서 최선을 위해 내준 적당함의 자리는 없었는가?
여전히 우리 앞에 놓인 삶의 자리는 제한과 한계의 연속이지만, 이제 포기의 명분부터 찾는 게 아니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우리가 돼 보자. 우리에겐 아직 많은 시간이, 우리 곁엔 아직 많은 이가 남아 있다. 상황과 환경의 파도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물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 시간 이후 마주할 우리의 삶이 적당함의 유혹을 넘어선 최선의 순간이 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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