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pop 스타를 만나다 - 2025년 K팝 결산
비록 어설픈 결과물일지라도…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진심의 기억
“1990년대 이후 최악의 해로 극도로 암울”
음반 판매량 줄고 맹목적 소비 피로감 호소
‘케데헌’ 인기 통해 진심의 음악에 팬덤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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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올라가, 이 순간은 바로 우리 거야.”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주제가 ‘골든(Golden)’의 후렴부를 여는 노랫말이다. 공개 당시 서브컬처를 깊이 있게 다뤘다는 점 정도로 주목받았던 작품은 올 한 해 전 세계를 휩쓸며 1990년대 한국에서 탄생한 종합 음악 제작시스템이 지난 30년간 쌓아 온 서사와 팬덤을 결집했다. 우리가 만들었지만 이제는 모두의 것이다. 빌보드 차트 8주 비연속 1위,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 노미네이트…. 그토록 갈망하던 미국 대중음악의 훈장도 이제 낯설지 않다. K팝 역사에 ‘영원히 깨질 수 없는’ 2025년이었다.
온 세계가 K팝을 듣고 있는 가운데 고국의 한 해는 어땠을까. 사실 한국에서 K팝은 언제나 위기다. 국제통화기금(IMF) 이후 단 한 번도 좋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 경제처럼 비슷한 시기 등장한 K팝 역시 언제나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묘사되곤 한다. 음악이 빈곤하다, 연습생 수가 줄어든다, 기획사 경영이 의심된다는 등 수많은 의혹과 갈등이 빚어진다. 전 세계 아이가 부모의 손을 잡고 헌트릭스와 사자보이즈의 노래를 따라 부를 때 우리는 K팝 아이돌에게 끝없는 증명을 요구한다. 무대 영상을 프레임 단위로 쪼개 노래와 춤 실력을 검증하고, 소통 플랫폼에서의 한마디를 도덕적 잣대로 판단한다. 법적 다툼과 연예계 가십이 쏟아지며 고고한 ‘초인’만이 모범적인 K팝 아이돌로 거듭날 수 있다.
이 같은 대중의 엄격한 수요를 맞추는 과정에서 오늘날 K팝을 구성하는 체계적인 제작시스템과 팬덤 운영의 노하우가 다져졌다. 그 과정에서 결국 모두가 나를 사랑하게 만들겠다는 자신감과 모두가 의심하는 가운데 고집을 밀어붙이는 도전정신이 음악에 깃들었다. 이것이 공명하며 세계를 수호하는 ‘혼문’을 이뤘다.
올해의 K팝 위기론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지금까지는 ‘더 잘돼라’였다면 이젠 ‘더 잘될까’를 묻고 있다. K팝이 재미없어졌다는 얘기도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K팝이 정상을 차지하면 화제가 된다. 음반 판매량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감소했다. 세계 시장에서의 숫자는 쏟아지는데, 밀리언셀링 앨범의 이름을 댈 수 있는 음악 애호가는 극소수다. 현장에선 아이돌을 지망하는 연습생이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는 비관적인 전망과 팔리지 않는 광고에 전전긍긍하는 관계자들의 증언이 쏟아진다.
2010년대 K팝의 양적 성장을 이끌었던 방탄소년단(BTS)과 같은 슈퍼그룹이 부재한 사이 음악산업의 패러다임을 바꾼 팬덤경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미묘해졌다. 대중은 응원그룹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묻지마 소비에 피로감을 느낀다. 미국의 음악평론가 조슈아 민수 킴은 SNS X에서 “올해 K팝은 1990년대 이후 최악의 해로, 극도로 암울했다”는 혹평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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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K팝은 지루해졌을까. 역설적으로 K팝의 성장동력이었던 산업화에 원인이 있다. 한때 ‘한국 음악’ 전체를 지칭하던 K팝은 이제 국적과 장르를 넘어선 제작공정으로 자리 잡았다. K팝 아이돌 제작은 기획부터 음악, 안무, 미디어, 투어를 겨냥하고 설계되는 브랜드 생산과정이다. 각 단계에 특화된 부서가 필요한 요소를 조립하고, 체계화된 육성과정을 거쳐 선발된 연습생이 최종 발탁돼 무대에 나선다.
이 같은 고도의 산업화가 제작 표준을 세우는 것을 넘어 창작 전반의 태도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전 세계 곳곳의 음악기지로부터 데모를 수급해 옥석을 가려 음악을 ‘조립’한다. 자연히 작곡가, 프로듀서 같은 창작가보다 데모를 정하는 실무담당자, 기획자의 영향력이 커진다. 세련된 만듦새와 세계적 유행을 가장 발 빠르게 도입하는 요즘의 K팝이 왠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진다면 이 산업이 기계적으로 만들어 내는 지식재산권 생산사업으로 변해 가는 까닭이다. 음악은 그 구성요소 중 일부일 뿐이다. 인간이 만드는 데도 매우 기계적이다.
2025년 우리가 열광했던 K팝은 산업 논리가 적용된 기획물이 아니라 인간이 중심에 있는, 본연의 가치에 충실한 기초적인 태도의 결과물이었다. 실험적인 ‘믹스팝’ 콘셉트로 난항을 겪던 걸그룹 엔믹스의 성공은 이를 증명한다. K팝 걸그룹에 낯선 전위적인 소리 활용과 장르 융합의 기치를 꿋꿋이 이어 나가며 ‘갈 수 있는 가장 끝까지(High Horse)’를 다짐하는 소녀들의 모습이 멤버들이 작사·작곡에 참여하지 않음에도 주체성을 각인했다.
블랙핑크로부터 품고 있던 자아를 해방한 로제, 리사, 지수, 제니가 솔로활동으로 거둔 성과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서툰 면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그것이 매력적이란 사실을 증명했다. 전 세계인이 손을 겹치며 따라 불렀던 ‘아파트(APT.)’, 자신의 이름을 예순네 번 반복하는 ‘라이크 제니(like JENNIE)’의 고집이 근사한 결과를 만들었다. 그 목표는 앨범을 몇백만 장 팔거나 월드투어를 다니겠다는 양적 성장이 아니다. 기획사의 로드맵에서 벗어나 창작으로 공백을 타개하고자 한 우주소녀 다영이 음악방송 1위를 차지하며 밝힌 소감은 무엇이었나. ‘많이 사랑받고 싶었다’였다.
다른 한편에선 이 같은 창작관조차 산업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미래의 모델도 등장한 해였다. 빅히트뮤직의 신인 보이그룹 코르티스가 대표주자다. 음악부터 안무, 뮤직비디오까지 창작 전반을 멤버들이 주도하고, 이를 대규모 투자로 뒷받침한다. 비록 지금은 아마추어라고 해도 올해 내놓은 음악의 잠재력은 대단했다. 올해로 창사 30주년을 맞은 SM엔터테인먼트는 오래 다져 온 역사의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라이즈, 하츠투하츠, NCT 솔로 멤버들의 활약은 새로운 얼굴과 이름에 반복해 적용해도 매력적인, 검증된 공식의 증명이었다.
결국 올해의 K팝 이야기는 ‘케이팝 데몬 헌터스’로 끝을 맺는다. 고국을 향한 애정으로 뭉친 이민자들이 기억하는 K팝은 무섭게 쏟아지는 공산품이 아니라 비록 어설픈 결과물이라도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진심의 음악이다. 그렇기에 ‘만들어진’ 사자보이즈가 갈등을 끌어안아 ‘태어난’ 헌트릭스를 이기지 못한 것이다. 2025년의 끄트머리에서 우리가 사랑한 K팝이 무엇이었는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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